와인/포도 품종

[프랑스] 피노 누아 - 섬세한, 그러나 강인한 부르고뉴의 왕 (재업)

까브드맹 2023. 11. 25. 07:31

피노 누아 포도와 잎의 모습

피노 누아(Pinot Noir) 만큼 까다로우면서 매혹적인 품종도 없을 겁니다. 작황이 좋은 해의 피노 누아로 만든 와인은 마치 비단처럼 매끄럽고 탄탄하며, 풍부하고 복합적인 향으로 많은 와인 애호가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아직 어리거나 작황이 안 좋은 해에는 너무 진하거나 묽고 맛도 안 좋아서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숙성 기간이 짧은 고급 피노 누아 와인은 딸기와 크랜베리 같은 달콤한 붉은 과일 향이 나오고, 숙성을 거치면 송로버섯과 부엽토 같은 복합적인 부케를 풍깁니다.

1. 피노 누아의 특성

1) 이름의 뜻

피노(Pinot)는 영어로 파인(Pine)으로 소나무를 뜻합니다. 촘촘하게 알이 맺힌 포도송이 모양이 솔방울과 형태가 비슷해서 붙은 이름이죠. 누아(Noir)는 검다는 뜻으로 포도알의 색이 검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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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까다로운 재배 조건

피노 누아는 가장 재배하기 까다로운 품종 중 하나입니다. 재배할 때 꼼꼼하게 살피지 않으면 피노 누아 본연의 맛을 살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죠. 조생종인 피노 누아는 날씨가 더우면 잘 자라지 못합니다. 건조하지도 않고 습하지도 않으면서 비교적 선선한 기후를 좋아하죠. 역시 까탈스럽죠? 그래서 약간 추운 대륙성 기후 지역이나 덥지 않은 북반구의 서늘한 지역이 피노 누아 재배에 알맞습니다. 부르고뉴처럼 대륙성 기후가 뚜렷한 지역이나 고산 지대가 이런 조건에 맞는 곳이죠.

부르고뉴보다 더 서늘한 독일의 라인강 남쪽과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피노 누아를 많이 재배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와 칠레의 고산지대, 미국 북서부의 오리건(Oregon)주, 서늘한 기후가 나타나는 뉴질랜드 남섬에서도 피노 누아를 많이 재배합니다.

3) 섬세하고 매혹적인 맛과 향

피노 누아는 기르기 힘들고 양조도 까다롭지만, 와인으로 만들면 대단히 매혹적인 포도입니다. 피노 누아 와인은 매혹적인 향이 아주 섬세해서 양조법을 조금만 달리 해도 품종이 보여주는 신선한 맛과 향,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느낌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고급 피노 누아 와인을 만들려면 포도를 재배하는 사람도, 와인을 만드는 사람도 남다른 실력을 갖춰야 하죠.

피노 누아 와인의 색상

피노 누아 와인은 아름다운 루비색을 띱니다. 아주 맑고 깨끗하며 광택이 나죠. 의류업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버건디 컬러(Burgandy color)는 피노 누아 와인의 색과 같은 빨간색을 뜻합니다. 와인이 숙성하면서 주변부의 색은 점차 가넷빛으로 바뀝니다.

포도 껍질이 얇아서 탄닌 함량은 높지 않지만, 산도는 까베르네 소비뇽보다 높고 과일 향이 풍부합니다. 바디는 미디엄 정도며 숙성이 비교적 빠르죠. 고급 피노 누아 와인을 마셔보면 부드럽고 탄탄한 질감이 마치 비단 같습니다. 그래서 피노 누아 와인 시음기를 보면 ‘silky’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죠. 피노 누아 와인은 숙성 능력이 강한 편은 아니지만, 최고급 피노 누아 와인이라면 20년 이상 보관할 수도 있습니다.

와인을 마시다 보면 선호하는 와인 스타일이 바뀌며, 어느 정도 패턴이 있습니다. 대개 달콤한 화이트 와인으로 시작해서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으로, 가볍고 부드러운 레드 와인에서 점점 묵직하고 떫은맛이 강한 와인을 찾게 되죠. 묵직하고 떫은 풀 바디 와인에 지쳤을 즈음에 비로소 빠져드는 것이 섬세하고 관능적인 피노 누아 와인의 세계입니다. 맑은 루비 빛의 피노 누아 와인에 한 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기 쉽지 않죠. 물론 초보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와인을 어느 정도 마셔본 후에야 그 진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화학조미료 맛에 익숙해지면 자연식품의 맛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처럼, 자극적이고 강한 와인에 익숙한 상태라면 탄닌이 적고 섬세한 피노 누아 와인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4) 불안정한 DNA

유전적으로 불안정한 피노 누아는 변이가 잘 일어나는 품종입니다. 현재 100여 개에 이르는 피노 누아 클론이 존재하고, 이중 이용 가능하다고 인증된 클론 수는 70여 개 미만이라고 합니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의 맛과 향을 다른 지역에서 따라 하려고 해도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것이 피노 누아의 이런 특성 때문이죠. 유전적 불안정성 때문에 같은 나무에서 자른 가지를 심어도 기후와 토양이 다르면 맛과 향이 바뀌니까요.

2. 피노 누아의 역사

피노 누아의 원산지는 샤르도네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부르고뉴입니다. 존 윈스롭 해거(John Winthrop Haeger)는 저서인 <북미의 피노 누아(North American Pinot Noir)>에서 로마 시대 기록에 비슷한 특징이 묘사된 포도가 나올 정도로 피노 누아가 오래된 품종이라고 밝혔죠. 그러나 품종의 근원에 관한 DNA 테스트에서도 피노 누아의 부모 품종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토 수도회의 수도승 모습

피노 누아에 관한 기록은 AD 400년경의 문서에 이미 보이며, 14세기 후반 부르고뉴 지역의 기록에서 특히 많이 언급됩니다. 부르고뉴 지역 밖으로 피노 누아를 퍼트린 사람들은 아마도 시토 수도회(Cistercian Monks)의 수도승들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프랑스에 있는 시토 수도회 소속의 수도원에서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지의 시토 수도회가 있는 마을로 전파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19세기 이전에는 피노 누아의 신대륙 전파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피노 누아가 신대륙으로 건너간 시기는 20세기 이후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3. 피노 누아 재배지

1) 프랑스

프랑스 부르고뉴에선 오래전부터 피노 누아를 재배했습니다. 보졸레 지역을 제외한 부르고뉴 전역에서 레드 와인용 포도로 피노 누아를 사용하며 다른 포도는 거의 재배하지 않습니다. 샹파뉴에서는 샤르도네, 피노 므니에와 함께 샴페인 제조용 포도로 피노 누아를 재배합니다. 알자스에서도 피노 누아를 재배하지만, 국내에 들어온 알자스산 피노 누아 와인은 별로 없습니다.

2) 독일

독일에서는 피노 누아를 슈페트부르군더(Spätburgunder)라고 부릅니다. 예전에는 특유의 과일 향이 나올 뿐이지 부르고뉴산 피노 누아 와인 같은 복합적인 맛은 찾기 힘들었는데 근래에는 뛰어난 품질과 매력적인 개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와인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3)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는 피노 네로(Pinot Nero)라는 이름으로 재배합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고지대에 있는 경사진 밭에서 신선한 기운과 함께 천천히 익은 포도로 만든 와인은 흔치 않은 복합미(複合味)와 섬세한 맛을 갖고 있죠. 다만 생산량이 적습니다.

 

 

4) 미국

미국의 포도 재배지 중 가장 선선한 오리건주는 대륙성 기후가 북태평양의 바닷바람과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곳의 피노 누아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13% 이상 나오지만, 선선한 기후 속에서 수확을 늦게 하여 만족할 만한 수준의 산도와 탄닌, 색상, 복합적인 맛과 향을 갖췄죠. 오리건과 캘리포니아의 최고급 피노 누아 와인을 마셔보면 나름대로 양조 비결을 터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뉴질랜드와 호주

주요 포도 재배지인 말보로(Marlborough)와 헉스 베이(Hawke's Bay),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 기즈번(Gisborne)을 중심으로 다른 흑포도보다 활발하게 재배합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 와인이 국내에도 많이 들어왔죠.

호주는 선선한 지역인 야라 밸리와 태즈메이니아섬에서 피노 누아를 재배합니다.

6) 칠레

칠레에서도 피노 누아 재배와 와인 생산량이 늘고 있습니다. 와인 품질이 많이 좋아졌고 일부 와인은 뛰어난 맛과 향을 보여줍니다.

4. 피노 누아 와인의 향

부엽토

피노 누아 와인에서 많이 풍기는 향은 딸기(Strawberry)와 체리(Cherry), 라즈베리(Raspberry), 크랜베리(Cranberry) 같은 빨간 베리류의 과일 향입니다. 여기에 오크통 숙성을 통해 배인 나무와 향신료 향이 더해지죠.

과일과 나무 향이 주로 나오지만, 숙성되면서 새로운 향이 추가됩니다. 버섯과 송로버섯, 제비꽃, 박하(mint) 같은 식물성 향이 나오고, 부엽토와 퇴비 같은 흙냄새(Earthy), 가죽과 고기 같은 동물성 향까지 나타나죠. 식물성과 동물성 향을 함께 풍기는 야누스 같은 면모는 피노 누아 와인의 매력입니다.

5. 피노 누아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보통 풀 바디인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과 달리 피노 누아 와인은 대부분 미디엄 바디여서 어떤 고기 요리에도 잘 맞습니다. 소고기와 양고기, 돼지고기 가공식품(charcuterie), 파스타와 피자, 참치 같은 붉은색 물고기와 연어, 닭과 칠면조, 야생 조수 고기(game), 경성 치즈, 버섯 등등이 피노 누아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이죠. 특히 참치 머리의 붉은 살 부위는 레드 와인은 생선과 안 어울린다는 편견을 깰 만큼 잘 어울립니다.

고추와 마늘, 향신료 같은 자극적인 양념이나 토마토처럼 산미가 강한 소스를 사용한 요리도 괜찮지만, 담백하게 조리한 쪽이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