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프랑스] 순둥인 듯싶지만 알고 보면 깐깐한 막내 - Le Haut-Medoc d'Issan 2004

까브드맹 2010. 8. 10. 09:14

르 오-메독 디쌍 2004

1. 르 오-메독 디쌍(Le Haut-Medoc d'Issan)

르 오-메독 디쌍은 1855년 3등급 그랑 크뤼인 샤토 디쌍에서 나오는 대중적인 와인입니다. 샤토 디쌍에는 그랑 뱅(Grand Vin)인 샤토 디쌍(Chateau d'Issan)과 세컨드 와인인 블라종 디쌍(Blason d’Issan, 디쌍의 문장(紋章)), 그리고 보르도 슈페리에르 급의 물랭 디쌍(Moulin d’Issan)과 함께 오-메독(Haut-Medoc) 지역 명칭을 사용하는 샤토 드 깡달(Chateau de Candale)이 있었는데, 샤토 드 깡달의 이름을 바꿔서 시장에 내놓은 것이 르 오-메독 디쌍입니다.

샤토 디쌍블라종 디쌍, 물랭 디쌍, 르 오-메독 디쌍
(샤토 디쌍의 왕언니 '샤토 디쌍'과 디쌍 가문의 자매들)

아마 생산하는 와인의 이름을 디쌍으로 통일해서 인지도를 높이려는 모양이죠? 각 와인의 레이블에 공통으로 들어간 문구인 'Regum Mensis, Aris que Deorum'는 '왕들의 만찬과 신들의 제사를 위한(for the Tables of Kings and the Altars of the Gods)'이라는 뜻입니다. 샤토 디쌍은 부드럽고 섬세하지만, 때론 도발적인 향기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며, 은은하고 향기로운 오크 향과 잘 익은 달콤한 과일 향, 부드러운 탄닌으로 우아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와인입니다. 샤토 디쌍은 한때 관리 소홀로 3등급의 명성에 안 어울리는 와인을 만든 적이 있었지만, 1995년 이후로 품질이 향상되어 최근에는 시장에서 꽤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블라종 디쌍도 샤토 디쌍만큼은 아니지만, 꽤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세컨드 레이블이지만 농축된 맛과 향으로 샤토 디쌍의 높은 품질과 매력을 대변해주는 와인이죠. 최근에는 가격이 상당히 올라갔지만, 2007년까지만 해도 품질과 비교해 가격이 저렴해서 종종 사서 마시곤 했습니다. 르 오-메독 디쌍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지역 명칭(Appellation)이 '오-메독(Haut-Medoc)'입니다. 샤토 디쌍과 블라종 디쌍의 아펠라시옹이 마고(Margaux)인데 르 오-메독 디쌍의 아펠라시옹이 오-메독인 것은 샤토 디쌍의 뒤쪽에 펼쳐진 약 20여 헥타르의 포도원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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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향과 맛

그렇다면 디쌍 가문의 막내랄 수 있는 르 오-메독 디쌍의 향과 맛은 어떨까요?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메를로(Merlot)를 섞어서 만든 이 AOC 와인에서는 먼저 블랙커런트와 붉은 체리 향이 얌전하게 흘러나옵니다.

12.5%의 알코올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입안에 적당한 강도로 힘을 주는 걸 느낄 수 있죠. 비록 샤토의 최하급 와인이지만, 명가의 솜씨로 양조해서 산도, 당도, 탄닌의 세 요소가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맛을 보여줍니다. 지금 한창 맛의 절정을 달리며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데, 풍부한 붉은 과일 향 때문인지 살짝 단 느낌입니다. 탄닌은 6년간 충분히 숙성해서 매우 부드러우며, 적당한 산도가 입안을 자극해 음식 맛을 돋워주는 걸 느낄 수 있죠. 전체적으로 잘 익은 신선한 붉은 과일을 떠올리게 하는 향과 맛으로 청초하고 정숙하게 잘 성장한 처녀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초반에 가졌던 이미지는 시간이 흘러 와인이 더욱 진해지면서 변합니다. 개봉 후 1시간이 넘으면 처음엔 느끼기 힘든 강렬하고 팽팽한 기운을 뿜어냅니다. 마치 들라크루아의 "1830년 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같은 강인한 투사의 이미지랄까요?

1830년 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마치 이런 느낌?)

함께 시음했던 누군가는 처음부터 성깔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엔 숨어있어서 알아챌 수 없었던 깐깐한 성질이 시간이 흐르면서 드러난 것 같았습니다. 이즈음엔 초기의 과일 향에 덧붙여 은은하고 고귀한 향나무 향과 부드럽고 신선하며 크림 같은 향이 그 기운 속에 섞여서 함께 흘러나오는 걸 맡을 수 있는데요, 이로써 이 와인이 훌륭한 누이들인 샤토 디쌍이나 블라종 디쌍과 같은 DNA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어로 익혀서 최소한의 소스만 뿌린 소고기 스테이크, 강렬한 향취를 지닌 야생 동물 고기와 내장 구이와 함께 마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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