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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메치기 기술로 유명하며, 일찌기 전 세계에 보급되었고 제 18회 하계올림픽인 동경올림픽을 통해 올림픽 공식 종목으로 채택된 유도_柔道, 우리나라의 금메달 밭이기도 한 유도는 어떻게 해서 탄생되었을까요?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어 있는 유도의 원형(原形)이 되는 무술은 일본에서 태동하여 발달한 '야와라(柔術)'라는 격투술입니다.
그녀의 이름도 고대 격투술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이미지 출처 : http://column.penguinmissile.lolipop.jp/?eid=363193
일본에서 무사 계급이 발흥하기 시작한 12세기, 일본의 무사(武士)들은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지키고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맨손 격투술을 익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일본에 널리 퍼져있던 격투술은 일본의 전통씨름인 '스모(相撲)'가 있었고, 스모는 일본 격투술의 가장 원시적이면서 기본적인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천황이 궁중에 신하인 '누미스쿠네'와 '다이마노케하야'를 불러 스모를 하게 하고 관람하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요, 이 시합에서 노미스쿠네는 다이마노케하야를 차서 넘어뜨리고 가슴을 발로 밟아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여버립니다. 무척 살벌한 내용이지만 그만큼 원시적인 형태의 스모가 오늘날의 것보다 훨씬 실전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후 스모는 일본의 천황이 전국의 역사들을 모아 시합을 하게 하고 이를 관람하는 행사로 발전하는데, 8세기에 이르면 스모의 48수의 기법이 제정되면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찌르고 때리고 발로 차는 3가지 법은 금지됩니다. 스모가 격투술보다는 신에게 바치는 제례(祭禮)의 하나로 중요시되면서 각종 기법이 의례화되고 형식화되기 시작한 것이고, 이에 따라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맨손 격투술로서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지요.
19세기말의 일본 역사(리키시)들. 연출 사진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formosasavage/2160209851/in/set-72157603660864298/
이렇게 되자 무사들은 격투술로서 가치가 떨어진 스모를 멀리하게 되고, 스모를 발전시킨 '구미우찌(組計)'라는 격투술을 익히게 됩니다. 구미우찌는 스모에서 더욱 발전한 격투술로, 12세기의 일본 무사가 익혀야할 격투술이었습니다. 구미우찌의 형태는 현재의 유도기술과 상당한 유사점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갑옷 입은 상대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던지기 기술이 발달해 있으며, 또한 던져 쓰러뜨린 후에도 계속하여 조르고 꺾는 등의 굳히기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중요시 되었습니다.
구미우찌는 14세기말경부터 16세기말에 이르는 일본의 전국시대에 이르러 더욱 더 발전을 하게 됩니다. 전국시대에 각 지방에서 득세하던 영주(大名, 다이묘)들은 다른 영주들과의 전쟁을 위해 많은 무사들을 필요로 했지만, 여건상 하급무사(足經, 아시가루)들에게까지 지급할 무기가 부족하였기 때운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술 훈련, 특히 맨손 격투술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구미우찌는 이러한 맨손 격투술의 필요성에 의해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더욱 발전된 형태인 '고구소꾸(小具足)'와 '고시노 마와리(腰之會)'라는 원유술(原柔術)이 탄생됩니다.
고구소꾸는 1척 2촌(약 40cm) 길이의 짧은 단도(短刀)를 갖고 하는 격투술이고, 고시노마와리는 적을 포박하는 기술인데 모두 유술의 원류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고구소꾸와 고시노마와리는 모두 신속한 동작을 필요로 하는 기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처럼 민첩성을 요구하는 기술이 발달하게 된 것은 당시 전쟁의 형태가 기마전에서 도보전으로, 중장비의 무기에서 경장비로 변화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구미우찌뿐만 아니라 유술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준 발전된 기술로는 도리데(捕手)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리데는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기술을 걸어 꺾고, 굳히고, 쳐서 상대를 제압하는 기법의 형_形을 말하며, 1532년에 최초로 유술을 창시한 다께우찌(竹內) 유파에 의해 더욱 발전됩니다. 다께우찌류는 도리데 기법뿐만 아니라 고구소꾸, 고시노마와리 기법을 체계화시킨 일본 유파중의 하나로, 당시 일본전역에 산재해있던 다양한 격투술을 체계화시키고 가일층 발전시켰으며 광범위한 보급활동으로 격투기술을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다께우찌류는 지금도 기법과 가계를 겸하여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 방계의 계보만도 30여파가 넘는다고 합니다.
원래 일본 유술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파로 알려진 것은 데이호우산(堤寶山)류였습니다.
하지만 제보산류는 그 기법을 단 한 명의 집안사람에게만 전하는 제도(一子相傳)를 갖고 있어서 결국 다께우찌 유파에게 밀려나 버리고 말지요 1.
일본 전국시대에 데이호우산류, 다께우찌류 등의 유술 유파가 성립된 이후 16~19세기에 이르는 도쿠가와 막부시대가 되면 대단히 많은 유술 유파가 성행하게 됩니다. 17세기 이후에 이르러 유술 유파들의 수가 무려 179개에 달하였다고 기록에 전하지만, 260여명의 유술 명인_名人들이 각 지역에 비전되어 내려오는 기법을 전수한 유파를 갖고 있었다고 하니 비공식적인 숫자는 그보다 더욱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수많은 명인들의 유파에 의해 발전되고 전수된 유술은 맨손 혹은 짧은 무기 밖에는 가진 것이 없을 때 무기를 가진 상대방에게 대항하는 기술을 체계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검에 검법이 있고 창에 창술이 있는 것과 같이 유술은 일본의 전국시대에 빈번하게 전개되었던 구미우찌, 고구소꾸, 고시노 마와리, 도리데, 권법(捲法) 등의 기법을 구체적으로 체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술의 형태는 지금의 유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기술들(급소치기, 포박술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근대 유도의 원시적인 형태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유술의 기원에 관해 일본 문헌중 "본조무 예소전(本朝武 藝小傳卷之十卷)"에는 명나라인 진원빈(陳元斌)이 3인의 일본 낭인에게 그 기법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서두에 실려있습니다. 그 기록에 의거해서 유술이 명나라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야마모토 요시야스(山本義泰) 같은 일본 학자들은 진원빈이 일본에 상륙한 연대(1626년)가 그 일본 낭인중 한명인 후쿠노시쯔로(福野七郞)가 저술한 야와라의 저서 "양이심당류(良移心當流)"의 저술 연대인 1622년 3월보다 뒤였음을 들어 야와라가 진원빈에서 출발했다는 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근대 유도_柔道의 발생기인 19세기말~20세기 초반은 중세 무사들의 격투술에 지나지 않았던 유술이 비로소 무도(武道), 나아가서 스포츠로서의 형태를 취하는 시기입니다. 여기서 무도로서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은 '산만했던 유술을 정리하여 기술체계를 확립하고 거기에 사상적, 정신적 바탕을 세움으로써 기술과 정신의 완성을 통한 인간수양의 도(道)로 변화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근대 유도의 아버지인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郞, 1860-1938)라는 유도인에 의해 이룩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anjuro.cocolog-nifty.com/blog/2006/12/index.html
가노 지고로는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체력 단련을 위해 18세 때에 천신진양류(天神眞楊流)의 고수인 복전팔지조(福田八之助)에게 유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22세(1881; 명치 14년)에는 반구보항년(飯久保恒年)에게 기도류(起倒流)의 유술을 배웁니다. 천신진양류는 평복을 입은 상대를 대상으로 던지고, 치고, 잡는 기술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르기, 급소치기, 배대뒤치기, 다리후리기, 허리튀기 등이 대표적인 기술이었죠. 그리고 기도류는 탁월한 메치기 기술을 장기로 하며 갑옷을 입은 사람을 상대로 고안된 던지기 기법이 특기였습니다.
기도류 봉(棒)기술. 아미지 출처 : http://honda4377.hp.infoseek.co.jp/akinomaturi04.html
이 두 유파의 기술은 훗날 근대 유도를 구성하는 중요한 두가지 축이 되는데, 기도류의 기법은 메치기 기술의 축으로, 천신진양류의 기법은 굳히기와 지르기 기술의 축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가노지고로는 천신진양류와 기도류의 유술을 배우면서 이 두 유술이 단순한 격투술이 아니라 교육적인 면으로써 또한 일본 무도문화재로써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가노 지고로는 당대 유술유파들의 기술과 원리를 비교 검토하고 실제적인 연습과 연구과정을 거쳐 유도의 기본원리를 집대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신진양류의 급소치기, 굳히기 등의 기술과 기도류의 던지기 기술을 바탕으로 효율적인 유도의 기술원리를 정리하였으며, 더 나아가 새로운 기술을 창시 2하여 당시 사회에 합당한 기술체계를 확립하게 됩니다.
새롭게 마련된 기술체계로 대표적인 것이 자유대련인데요, 당시 일본 유술계에서는 자유대련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대련시 제한규정이 없어 상대방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시합(詩合)이 아니라 사합(死合)이란 말이 쓰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도에서는 시합을 할 때 지르기 등의 치명적인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낙법을 쓰지 못하도록 메치기와 조르기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금합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초보자라 하더라도 부상의 걱정없이 안심하고 대련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이는 유도가 훗날 유술과의 시합에서 승리하고 발전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그밖에 산만한 기술 체계를 정리하여 일관된 형태의 기술을 전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본(本)을 제정하고, 수련자의 발전 정도를 쉽게 파악하고 수련 의욕을 북돋울 수 있는 단(段) 제도도 도입하지요.
가노 지고로는 단순히 투기적 요소만 갖고 있던 유술에 지(智)와 덕(德)을 기를 수 있는 정신적, 사상적 측면을 더하여 무도(武道)로서 변화시키고, 명칭 또한 유도로 개칭합니다. 1882년(명치 15년)에 이르러 가노지고로는 '도를 강론한다'는 뜻의 강도관(講道館) 도장을 설립하였으며 이곳에서 역사적인 강도관 유도의 첫발을 내디디게 됩니다. 이것이 근대 유도의 시작이며 1886년에 후지미쵸(富士見町)로 도장을 옮기면서 본격적인 강도관 유도의 형태와 제원리를 확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유도는 일본을 대표하는 무도이자 근대 스포츠로 발전하게 되고, 검도와 함께 일본의 국기(國技)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