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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책 이야기

불나비 - 구도(求道)하는 검객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은 한국 만화에 있어 수 많은 작가들이 명멸했던 시기라고 봅니다. 만화라는 장르의 세계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만화에 대한 탄압은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만화 탄압에 대해서는 특별히 얘기할 필요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개성있는 그림체를 갖고 독자들 앞에 다가선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가 지나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현세라는 걸출한 만화가의 등장으로 인해, 만화가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현세와 비슷한 그림체로 자신의 화풍을 바꾸게 되고, 이에 적응하지 못한 만화가들은 만화판에서 사라지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만화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출판사들 탓이 크다고 봅니다. 출판사에서는 만화의 독창성 보다는 이른바 "팔리는 그림체로 된 만화" 만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인기 작가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일본 만화의 화풍과 캐릭터를 도용해서 만화를 그릴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이 있었던 것이죠.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초반을 거치는 사이에 사라진 만화가들 중에서 제 기억에 남아있는 만화가들이 몇 분 계신데, 그중에 독특한 화풍과 스토리를 갖고 계신 분이 만화가 김민님이십니다. 그 당시의 많은 만화가들이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그렸는데요, 김민님도 상당히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그렸습니다. 크게 나눠보면

1. 원시인들의 생활상을 그린 만화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김민님의 만화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결말은 원시인들이 현대 문명과 만나게 되면서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요. 현대인들이 원시인들이 반짝돌(다이아몬드)을 캐오는 동안은 극진히 대해주다가 반짝돌이 다 떨어지자 푸대접하기 시작하고, 이에 격분한 원시인들이 난동을 부리자 동물원에 가두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2. 현대 개그물

김민님의 유명한 캐릭터인 허떨이와 모모가 등장하는 만화들입니다. 여기에 구두쇠 영감이 약방에 감초꼴로 끼고, 그분이 세를 놓고 있는 다 무너지는 아파트 - 바람이 불면 건물이 흔들려 거주민들이 '무너진다!' 하면서 뛰쳐 나오는 - 가 등장하지요. 구두쇠 영감이 사용하는 가구인 사과 괘짝과 그 안에 매달려 있는 반찬 조각(?)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귀한 손님이 오면 반찬 조각 중에서 소고기 조각을 꺼내 물에 두번 휘휘 젓고, 그걸 촛불에 끓여서 쇠고기국이라고 대접하지요 ^^. 그야말로 최강의 구두쇠!

3. SF 장르

외계 문명이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만화도 그리셨습니다. 인상 깊은 장면으로 미래에 로봇 문명이 발달하게 되고, 인간은 놀고 즐기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로봇에게 일임하게 되는 시대가 오게 됩니다. 로봇들은 인간에게 거역하는 일도 없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인간에게 불행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두 가지 결말이 기억납니다.

하나는 놀다가 지친 인간이 일을 하려하자 로봇이 이를 못하게 말리고, 인간이 반항을 하자 잡아가두는 장면입니다. 인간은 놀아야 하고 일은 로봇이 해야 하는데 이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이 반복되자 로봇들은 결정을 내리지요. 일을 해야하는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인간들을 잡아가두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일을 할 수 없도록 말이지요.

또 다른 결말은 로봇 공장에 알 수 없는 화재가 나게 되고, 이를 수리할 수 있는 로봇도 모두 불타 없어지는 상황입니다. 로봇의 수명은 30년. 로봇들이 모두 작동을 멈춘 30년 후에 인간들만 남게 되는데, 인간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게 없어 다시 원시 시대의 단계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불행한 결말 외에도 다소 희망적인 결말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의 인간이 사고로 인해 다치고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하자, 냉동 상태로 만들어 보존한지 수 백년. 더 이상 인간들이 무능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몇몇 의식있는 인간들은 과거의 기록을 뒤지다가 냉동 인간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냉동 인간 보존소를 찾아내서 냉동되었던 현대인을 부활시키지요. 부활한 현대인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로봇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공장을 습격하고 에너지 공급을 차단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로봇들은 작동을 멈추게 되고,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문명을 일으킨다는 내용입니다. 

4. 대하 역사물

벤허나 연개소문,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 같은 대하 역사물을 그리기도 하셨습니다.


5. 무협물

무협물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불나비지요.

불나비 (이미지 출처 : http://www.hani.co.kr/cine21/K_C971R087/C971R087_042.html)

불나비는 여러모로 따져봐도 미야모토 무사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캐릭터입니다. 양손으로 칼을 쓰는 이도류 검법이라던가, 검을 구도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 꽃꽂이 에피소드 등등이 그것인데요, 여기에 김민님의 생각이 더해져서 무사시와는 다른 캐릭터로 승화되지요.

배경은 중국의 5대 10국 시대(당나라 이후 송나라 전까지)로 바뀌고, 무사시가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세키가하라 전투 전까지 고향에서 자란데 반해 불나비는 멸문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허물어진 절터에서 집안의 늙은 하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난다는 점,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의 마지막은 장검의 달인 사사키 고지로와의 결투로 끝나지만, 불나비는 성을 되찾고 농부들과 함께 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점 등이 달라지고, 무엇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는 미야모토 무사시에서는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스토리와 철학 등이 베어져 나옵니다.

오리지날 에피소드 중의 하나로, 불나비가 창술로 유명한 가문에 찾아가 결투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가문의 문주(門主)와 창 대신 봉으로 시합을 하게 되는데, 불나비는 상대방이 봉으로 찔러오자 봉의 끝을 피해 몸을 위로 날리죠. 문주가 불나비의 움직임을 따라 봉을 위로 올리지만 불나비의 가슴에 약한 타격만 줄 뿐이었죠.

                           

        ----------> ■ ↑   불나비의 움직임         

       문주의 봉      

            불나비

           ■■■■

              │ 

              │   문주의 봉

              │ 

요런 움직임이 된 겁니다. 봉을 타고 내려온 불나비는 그대로 문주의 머리를 가격! 문주는 쓰러지고 불나비는 문주의 아들과 문하생들의 증오와 분노에 찬 시선을 뒤로 하고 자신이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스님에게 찾아가 대결의 결과를 얘기 합니다. 스님은 과연 귀공이 이겼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지고, 불나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이 적을 쓰러뜨렸기에 이긴 것이 아니냐고 되묻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반문하지요.

"만약에 봉이 아니라 창이었다면 귀공은 어떻게 되었겠소?"

여기서 불나비는 깨닫게 됩니다. 문주의 실력이 자신 보다 훨씬 위였고, 대결에서 이겼다고 자신이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자만심을 탓하죠. 후에 문주의 아들이 복수를 위해 찾아왔을 때도 불나비는 자신이 진 것이라고 얘기하고, 아들과의 대결을 회피하지만 아들의 끈질긴 도전에 결국 1대 1로 대결을 하여 아들도 쓰러뜨리고 맙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멸문한 성주의 아들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5대 10국의 무법시대이다 보니 곳곳에 도적떼가 설치는 것은 당연한 일(으잉?). 어떤 지역의 성주도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는 도적떼들을 토벌하느라 골머리를 썩힙니다. 그때 한 떠돌이 무사가 나타나 곳곳의 도적떼들을 혼자서 소탕하지요. 이에 성주는 그 떠돌이 무사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 무사를 성으로 초대를 하지요.

하지만 그 떠돌이 무사는 성주의 초대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자신을 만나보고 싶으면 성주가 직접 오라고 합니다. 이에 성주의 부하들은 화를 내며 그 건방진 무사를 잡아 죽이자고 하지만, 성주는 자신이 직접 찾아가서 그의 노고를 치하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주는 직접 찾아가 만나 본 떠돌이 무사는 성주가 지금 거처하고 있는 성을 점령할 때 멸문시켰던 전 성주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성주는 그때의 어린 아들이 이렇게 장성해서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에 대해 놀랐지만, 도적떼들을 소탕한데 대한 포상은 해야겠기에 원하는게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떠돌이 무사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하고의 대결이요."

성주는 떠돌이 무사와의 대결을 피하지 않고 몇날 몇시에 모처에서 만나 대결을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한 명의 부하도 거느리지 않고 몰래 성을 나가 떠돌이 무사와 만나서 대결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결의 결과는 놀랍게도 성주의 압승! 성주도 자신이 거처하는 곳이자 떠돌이의 무사의 아버지 소유였던 성을 날로 먹은 것은 아니였지요.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대결은 떠돌이 무사의 칼이 두동강 나는 것으로 끝나는데, 승리를 확인한 성주가 뒤돌아선 순간 떠돌이 무사는 분노와 낭패감과 억울함을 참지 못해 두동강난 칼로 성주의 등을 찌릅니다! 성주는 죽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된 셈이지만 떠돌이 무사는 자괴감에 휩싸이게 되지요. 성주가 아버지의 성을 빼앗았을 때 성주는 무사로서 당당한 실력을 겨룬 끝에 승리의 댓가로 성을 차지한 것이지만, 자신은 비겁한 수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무사로서의 자존심, 긍지도 모두 져버린 것이고, 자신이 존경했고 사랑했던 아버지의 명예에도 먹칠을 한 셈이지요.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요, 원수를 갚았지만 아버지의 이름과 무사로서의 자긍심은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결투 장소를 벗어난 떠돌이 무사는 이후 술에 빠져 지내면서 곳곳에서 시비를 벌이고 대결을 벌입니다. 그리고 그의 칼 앞에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가죠. 그렇게 해서 붙은 별명이 '미치광이 무사'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하고 떠돌이 무사는 더욱 더 광폭해집니다. 그러던 중 그는 불나비의 소문을 듣게 되고 불나비를 찾아가 결투를 청하게 됩니다. 불나비는 기꺼이 결투에 응하고 둘은 불나비의 성 근처에 있는 낮은 언덕 위에서 마주칩니다. 그리고 떠돌이 무사는 거기서 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었던 무사의 모습을 봅니다. 당당하고 평온하며 흔들림 없는 사내의 모습을, 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했던 무사의 모습을 보게된 것이지요.

두 사람의 대결은 어이없이 싱겁게 끝납니다. 떠돌이 무사가 검을 들고 불나비에게 달려들고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섞이는 순간 승부는 판가름나지요. 떠돌이 무사는 단 한합에 목숨을 잃게되는데, 죽어가는 그의 표정은 마치 무겁게 짊어지고 있던 모든 짐을 다 벗어버린 듯 편안한 모습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두가지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불나비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승패보다 진정한 승패가 무엇인지 묻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긴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고 진다고 진정으로 패한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막상 대결 장면이 많을 것으로 기대하고 만화를 봤다가 지리한 배경 얘기 끝에 몇 컷 안되는 승부 장면만 나와서 어린 시절 저의 마음에 좀 심심하고 허탈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럼에도 불나비 씨리즈가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봤었던 것은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 마음에 남는 것이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이제는 다시 찾아보기도 힘들고 다시 나온다고 해도 요즘 만화 애호층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이런 멋진 캐릭터를 창조해낸 김민님의 만화가 대부분 사라진데 대해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만화가들의 주옥 같았던 작품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고 머릿 속에서 회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합니다. 다행히 김민님의 경우는 네이버에 불나비/김민 카페가 있어 약간의 자료나마 정리되고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