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청주] 오랫동안 국가 공인 대표 청주 - 경주법주(慶州法酒)

까브드맹 2011. 2. 1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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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 지역 : 한국 > 경상북도 > 경주

● 재료 : 멥쌀 92.2%, 찹쌀 7.8%

● 어울리는 음식 : 불고기, 생선전, 육전 같은 전통 요리나 버섯 요리, 생선회 등.

경주법주는 본래 경주 교동의 최씨 가문에 전해오는 가양주(家釀酒)로 술을 만들 때 예법에 따라 빚는 시기가 정해져 있고 양조법도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법주(法酒)'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로는 불법을 따르는 승려들이 만들어 마셔서 '법주'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경주 최씨 가문은 우리나라 양반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을 대표하는 집안으로 유명하며 최부자 가문을 소재로 한 '명가(名家)'라는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이 집안의 가르침인 '육훈(六訓)'과 '육연(六然)'은 오늘날에도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매우 훌륭한 가르침이죠. 경주 최씨 가문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경주 율동 손씨와 양동 이씨 가문에서도 경주법주라 이름 붙인 술을 가양주로 썼다고 합니다. 

훌륭한 집안에 전해오는 가양주이지만, 오늘날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주법주는 이름만 따왔을 뿐 경주 최씨 가문에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용하는 원료도 조금 다릅니다. 최씨 가문의 가양주인 경주법주는 오늘날엔 최씨 가문이 사는 동네의 이름을 따서 경주 교동법주라 부르며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 배영신(裵永信)씨가 50여 년째 만들고 있죠. 재료는 찹쌀, 밀 누룩, 집 뜰의 우물물을 쓰며, 전통 방식에 따라 밑술을 만들고 덧술을 더한 후 발효해서 완성합니다. 알코올 도수는 16% 정도로 맑고 화려한 금빛을 띠며 감미로운 맛과 향기, 마시고 난 후의 깨끗한 뒤끝으로 정평이 있습니다.

반면에 경주법주는 소주 회사인 '금복주'의 계열사인 경주법주주식회사에서 만드는 술입니다. 재료는 30% 정도 깎은 멥쌀과 찹쌀을 각각 92.2%와 7.8%의 비율로 쓰고, 여기에 개량한 밀 누룩과 일본식 누룩인 입국을 사용하죠. 재료를 섞어서 저온에서 장기발효한 다음 약 100일간 숙성해서 만듭니다.

(뒷면의 백 레이블에 사용한 원료의 비율이 나옵니다)

이렇게 서로 상관없을 듯한 두 술이 같은 이름을 쓰게 된 것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일어났던 작은 사건 때문입니다. 닉슨 대통령이 방중하기 전에 미국은 우방국인 한국에 닉슨의 방중 배경을 설명하려고 당시 극동 담당자였던 마셜 그린 차관보를 파견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입국하기 전에 중국에 먼저 들렀던 마셜 그린은 그곳에서 중국의 대표주인 '마오타이주(茅台酒)'를 맛보고 그윽한 향과 맛에 깊은 인상을 받았죠. 한국에도 그런 술이 있는가 해서 박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 어떤 것인지 물어봤는데 박대통령은 그린 차관보에게 자신 있게 권할 만한 술을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박대통령이 집권하면서 1965년에 양곡관리법을 시행해서 쌀로 술을 담그지 못하게 했고,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간신히 살아남은 전통주들은 맥이 끊기거나 지하로 숨어들어 범죄자(?)들이 만드는 밀주의 형태로나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린 차관보에게 망신 아닌 망신을 당한 박대통령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술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때 선택된 술이 경주법주라고 합니다.


박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국세청은 대구와 경북지역의 소주업체인 금복주에게 술 개발을 맡겼고, 금복주는 국세청 기술 연구소와 함께 경주법주를 개발하는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전통주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들이 거의 사라진 상태라 경주법주를 개발하는 일은 어려움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경주 지방 율동 손씨, 교동 최씨, 양동 이씨 가문에 경주법주를 만드는 방법이 전수되어 온 덕분에 마침내 경주법주 개발에 성공합니다. 경주법주 관계자는 "이들에게 술 빚는 법을 배우면서 경주법주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게 됐다"라고 얘기하죠. 경주법주 대량 생산 기술을 얻은 금복주는 국세청에서 '경주법주' 제조면허를 받아 1972년 9월에 경주시 시래동에서 자회사 형태로 경주법주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경주법주를 생산합니다. 이후 경주법주는 국가를 대표하는 술로 1974년 미 포드 대통령 방한 환영 만찬회, 1975년 몽고 대통령 만찬회, 1977년 팀스피리트 훈련 참가 미 장병에 대한 하사품, 1985년대 남북 적십자회담 만찬회 등 각종 국가행사에 단골로 등장하게 되죠.

(경주법주가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 시대의 궁중비주라는 것은 문헌학적 근거가 없는 '전설'일 뿐입니다)

경주법주는 박대통령의 관심 덕에 주세법에서 특혜를 입기도 합니다. 당시의 주세법은 술을 탁주와 알코올 도수 13도 이하인 약주, 14도 이상인 청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경주법주를 위해서 "명약주(銘藥酒)"라는 주종을 새로 만든 다음 오로지 경주법주만 명약주로 구분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세율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금정산성 막걸리와 함께 박대통령이 뒤를 봐준 유이(有二)한 술이었던 거죠. 하지만 두 술이 특혜를 입는 동안 다른 전통주는 국세청의 단속으로 점차 소멸하였고, 시골에서 직접 누룩을 빚어 만든 술로 생계를 이어가던 수많은 사람이 생계수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결국, 소중한 우리 전통주가 많이 사라지게 되죠. 심지어 경주법주를 개발할 때 도움을 줬던 경주의 세 가문조차 박대통령 집권기엔 경주법주를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지 못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경주 교동 법주가 전국 팔대 민속주로 지정된 후에야 술을 만들고 팔 수 있었죠. 1972년에 경주법주를 개발하던 당시에 다른 전통주도 함께 개발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했으면 우리의 전통주 문화가 더욱 다양하게 전해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처음 나왔을 때 알코올 도수 16%였던 경주법주는 후에 도수가 점차 낮아져서 요즘은 13%로 생산합니다. 경주법주 관계자는 "시대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전통주 계승과 발전에 전념해 왔다"라고 하는데, 일본식 입국을 넣는 술에 어인 전통주? 경주법주가 좋은 청주이긴 하지만 전통 방식으로 만든 것이 아닌데 함부로 전통주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어불성설이겠죠.

포장 용기에 적힌 '순미주(純米酒)'는 쌀만 사용했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경주법주가 사케의 등급 중 하나인 '준마이슈(純米酒)'의 기준에 맞기 때문에 적어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우리나라 청주에서 순미주라는 용어를 쓴다는 얘기는 과문한 탓인지 들어보지 못했고, 국순당이나 배상면주가에서 나오는 청주에도 이런 표시는 없거든요. 참고로 준마이슈의 기준은 아래와 같습니다.

•백미, 입국 및 물만 사용해 양조해서 향미 및 색이 양호한 청주. 

백미는 3등 이상의 등급 설정 현미, 또는 이에 상당하는 현미를 도정해서 사용. 

입국의 총중량은 백미의 총중량에 대하여 15% 이상 필요. 

2004년 1월 1일 이후 정미율 70% 이하라는 규제 조항은 삭제. 

(접사로 찍다 보니 색상이 잘 안 나오네요. 조금 더 옅고 약간 어두운 기운이 있습니다)

맑고 깨끗한 미색으로 살짝 어둡습니다. 향은 별로 강하게 나오지 않으며 곡류의 단 향이 살짝 있습니다. 아울러 구수하고 달콤한 누룩 향도 조금 느낄 수 있죠.

질감은 부드럽고 깨끗하며 깔끔하게 떨어집니다. 순하고 차분하며 깨끗한 맛으로 잡스러운 맛이 느껴지지 않는 순수함이 있습니다. 마치 양갓집 규수 같은 인상을 주며 튀는 구석이 전혀 없네요. 그렇지만 개성 없는 밋밋한 느낌은 아니고, 잔잔하고 조용한 술이라 할 수 있죠. 개성 강한 스타일이 아니므로 불고기, 생선전, 육전 같은 전통 요리나 버섯 요리, 생선회 등과 잘 어울립니다. 다만 이런 술은 음식과 함께 마시면 그냥 마실 때보다 맛과 향이 강해지는 편이니 놀라진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부드럽고 적당한 산미가 올라와서 좀 더 맛있게 마실 수 있습니다. 여운은 다른 국산 청주와 비교했을 때 길게 이어집니다. 질감과 맛과 여운이 균형을 잘 이룹니다.

순한 맛을 부각하려 한다면 두드러진 향은 오히려 피할 필요가 있겠죠. 그래도 더 고급인 화랑 정도의 향이 났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700mL에 8천 원 정도의 가격은 시중에서 판매하는 청주중에선 비싼 편이지만, 와인이나 일본에서 수입하는 사케와 비교해보면 품질 대비 매력적인 가격입니다.

개인적인 평가는 D로 맛과 향이 부족한 청주입니다. 2011년 2월 11일 시음했습니다.

○ 국산 청주 시음기 글 목록

1.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 백화수복(白花壽福)

2. 우리 음식에 잘 어울리는 뛰어난 맛과 향을 갖춘 - 화랑(花郞)

3. 동급 최저 가격으로 심심한 맛과 향이 개성인 - 경주법주천수(慶州法酒天壽)

4. 종묘제례에 쓰이는 본격 국산 전통 청주 - 국순당 예담(禮談)

5. 천년을 이어온 전통 양조법인 백하주법으로 만든 - 배상면주가 차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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