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일반

[수다] 보졸레 누보에 관한 짧은 생각들

까브드맹 2010. 11. 20. 09:07

알배르 비쇼 보졸레 빌라지 누보 2010

1.

올해도 어김없이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맞이해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가 출시되었네요. 저도 종종 가는 와인 샵에서 2010년 보졸레 누보를 한 잔 얻어 마셨습니다. 원래 한 병 사서 지인들과 나눠 마시려 했는데, 이렇게 시음하게 되었으니 계획 취소! 돈 굳었습니다^^. 제가 마신 보졸레 누보는 알베르 비쇼(Albert Bichot)에서 나온 보졸레 빌라쥬 누보(Beaujolais-Villages Nouveau)였습니다. 일반 보졸레 누보보다 한 단계 위의 것이죠. 올해 알베르 비쇼의 누보는 신의 물방울을 그린 오키모토 슈가 레이블 디자인을 했군요. 그림 솜씨가 좋으니 레이블이 아주 화려합니다.

레이블 만큼이나 향도 매혹적이었습니다. 신선하고 향긋한 산딸기와 레드 체리 향이 났고, 여기에 달콤한 향이 겹쳐서 아주 매혹적인 체리 캔디 향이 나더군요. 향만 맡아도 잔을 잡아당겨 마시고 싶은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맛은 작년에 마셨던 죠르쥬 뒤뵈프의 보졸레만 못해서 좀 아쉽더군요. 전반적으로 작황이 예년만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알베르 비쇼의 누보가 죠르쥬 뒤뵈프의 것만 못해서인지는 비교 시음을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일단은 프랑스의 2010 빈티지 와인의 품질이 평년작에 머물 것 같다는 판단을 합니다. 뭐, 모르죠. 다른 누보를 마시고 반대의 평가를 할지도.

2.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보졸레 누보만큼 일반의 평가가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간 와인도 없을 겁니다. 200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에서 와인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을 때, 보졸레 누보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높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오래 묵지 않은 햇과일과 햇곡식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와인은 그렇지 않지만, 햇과일과 햇곡식에 대한 좋은 인식 때문에 '햇와인'으로 알려진 보졸레 누보는 그만큼 '좋은 와인'으로 인식되었나 봅니다. 또 국내에서 문화와 예술의 나라로 인식되어온 프랑스의 와인이고, 밉기는 하지만 우리보다 선진국인 일본에서 인기 많은 와인이란 점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죠. 그래서 와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보졸레 누보에 대해 한마디씩 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어느샌가 보졸레 누보는 꼭 마셔봐야 하는 '대단한 와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와인 수입사들은 이벤트 업체와 손잡고 호텔과 일류 레스토랑에서 거창한 보졸레 누보 출시 행사를 했죠. 저도 2001년에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며 비즈바즈 코엑스에서 열렸던 보졸레 출시 행사에 참석했었습니다. 당시 출시 행사의 입장권 가격은 보통 4~5만 원 정도였고, 비싼 경우에는 8~15만 원 가까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가격이지만, 당시엔 그 정도 가격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죠. 물론 행사에서 보졸레 누보만 나온 것은 아니고 다른 고급 와인들이 포함되기는 했습니다.

 

 

보졸레 누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동네 편의점에서도 11월이 되면 어김없이 보졸레 누보 구매 예약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2003년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한동안 보졸레 누보는 편의점을 통해서 많은 양이 팔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와인 좀 마셔봤다는 사람뿐만 아니라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도 보졸레 누보는 빠질 수 없는 11월의 와인 아이템이 되고 말았죠.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보졸레 누보는 보르도 와인이나 부르고뉴 와인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자리 잡을 것 같았는데...

영광의 시절도 잠시. 2005년까지 인기를 누리던 보졸레 누보는 그다음 해인 2006년부터 급격하게 인기가 시들어 갑니다. 와인에 관한 정보가 인터넷과 서점에 퍼지면서 소비자들이 보졸레 누보에 관해 알게 된게 원인이었죠. 프랑스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는 이 와인이 그다지 '고급' 와인이 아니며 오랫동안 보관할 수도 없는 '평범한' 와인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보졸레 누보에 낀 거품은 빠르게 사그라듭니다. 문제는 소비자들이 국내에 퍼진 보졸레 누보의 평가와 가격은 '과장'된 것이고, 수입사의 마케팅에 '속았다'라는 느낌이 들게 된 것이죠. 이런 상황에 대한 반감으로 보졸레 누보를 더더욱 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덧 보졸레 누보는 와인 세계에 입문할 때 꼭 마셔봐야 하는 와인에서 이제는 말을 꺼내면 와인 초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평가가 뒤집혔습니다. 예전과 같은 판매량을 생각하며 11월에 많은 양의 보졸레 누보를 들여놨던 점포들은 소비자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당황하며 재고 물량 처분에 고생해야 했고요. 그 후에도 보졸레 누보는 한 번 잃어버린 인기를 회복하지 못했는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엔 불경기와 맞물려 더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와인으로 전락해 버린 것 같습니다. 작년만 해도 보졸레 누보를 얘기하던 사람들이 조금은 있었지만, 올해는 아무도 보졸레 누보를 얘기하지 않네요. 신문에도 관련 기사는 별로 눈에 띄지 않고요. 한때 한 병에 3만 원이 넘었지만, 이제는 2만 원 초반대로 가격이 내려간 보졸레 누보. 다른 유럽 와인의 가격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가격이 내려가는 처량한 몇 안 되는 와인 중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한 방에 훅 간다"라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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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런데 과연 보졸레 누보가 마케팅으로 부풀려졌을 뿐인 별 볼 일 없는 '싸구려' 와인일까요?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절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물론 국내에 보졸레 누보가 들어오던 초창기에 거품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품일 뿐이다'라고 하기엔 보졸레 누보가 가진 가치와 특성이 너무 평가절하되는 것 같습니다. 보졸레 누보는 보졸레 지역의 특산 품종인 가메(Gamay)의 특징을 잘 살려서 만든 와인으로 신선하고 산뜻한 맛은 다른 와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개성입니다. 와인 생산자들은 이런 보졸레 누보의 특성을 강화하기 위해 탄산침용발효법(Carbonic Maceration)이라는 독특한 양조법을 고안해냈는데, 이 양조법은 포도 껍질에서 색소는 뽑아내지만, 탄닌은 빠져나오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보졸레 누보는 레드 와인으로는 드물게 차갑게 해서 마셔도 좋죠.

보졸레 누보는 누구나 부담 없이 편하게 마실 수 있는 향과 맛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제각각 다른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루두루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와인이기도 하죠. 비록 뛰어난 마케팅으로 판매량이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보졸레 누보가 원래 품질이 형편없는 와인이고 양조자들이 품질을 향상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보졸레 누보가 전 세계적으로 이토록 큰 인기를 끌진 못했을 겁니다.

또한 '햇와인'이라는 특성을 가진 보졸레 누보는 출시한 해의 프랑스 와인 품질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기도 합니다. 2009년의 훌륭했던 보졸레 누보의 품질을 떠올리며 2009년 빈티지의 다른 프랑스 와인 역시 품질이 좋을 거로 예측할 수 있죠. 해마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부터 대략 4개월가량 즐길 수 있는 보졸레 누보는 바로 그때만 마시는 '계절 와인'이라는 재미도 있습니다. 유통기간이 다른 와인과 비교해 유독 짧아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거든요. 2005년의 메독 와인은 올해도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제맛과 향을 느끼며 마실 수 있지만, 2010년 보졸레 누보는 내년 이맘때에는 더는 맛있게 마실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해마다 조금씩 다른 맛과 향을 가진 보졸레 누보를 친구들과 마시면서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시대의 화제를 말하는 것도 남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보졸레 누보는 그 자체로 뚜렷한 장점이 있는 와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비록 최고급 와인은 아니지만, 무궁무진한 와인 세계에서 뚜렷한 자기 자리를 가질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는 와인이라고 봅니다. 그동안 다소 거품 낀 가격으로 나왔지만, 점차 합리적인 가격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앞으로 해마다 11월이 오면 보졸레 누보 한 병을 사서 친구들과 나눠 마시면서 올해의 와인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4.

붉은 과일 향에 산뜻한 산미와 가벼운 무게감을 가진 보졸레 누보는 여러 종류의 음식과 마실 수 있습니다. 그냥 마셔도 되고, 간단한 안주를 곁들이려면 무염 크래커나 바게트와 함께 드시면 좋죠. 여기에 크림치즈나 리코타 치즈처럼 부드럽고 맛이 강하지 않은 치즈를 곁들이면 더 좋고, 살라미 같은 생햄을 함께 해도 좋습니다. 돼지고기 편육이나 소고기 수육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겁니다. 닭백숙이나 삼계탕도 좋고요. 다만 양념이 강한 고기 요리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탄닌이 거의 없어서 참치의 붉은 살 부위와 어울리는 몇 안 되는 와인이며, 채소 요리와 함께 먹어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