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자스(Alsace)
독일과 인접한 프랑스 알자스 지방은 오랫동안 독일의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중세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독일과 교류가 활발했고, 보불전쟁((1870. 7. 19~1871. 5. 10)이 끝난 후에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로렌 지방과 함께 독일에 귀속되었다가 1차 대전 후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다시 프랑스로 반환될 때까지 약 48년간 독일의 영토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소설 '마지막 수업'에서는 독일에 합병되어 다시는 프랑스말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는 슬픈 상황을 그린 장면이 나옵니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바로 보불전쟁 이후의 알자스 지역이죠. 그런데 소설에는 독일의 프랑스어 탄압으로 인한 '알자스 사람'들의 분노가 그려져 있지만, 그건 알퐁스 도데를 비롯한 ‘프랑스 사람’들의 감정이었고, 정작 당시 알자스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원래 알자스는 신성로마제국의 독립령으로 프랑스와 독일 양쪽에서 영향을 받아왔던 곳이지만, 독일의 영향이 더 강했던 곳입니다. 사용하는 말도 독일어 계통의 독자적인 알자스어였죠. 그렇기에 독일에 속해서 프랑스어를 배우지 못해도 알자스 주민들이 슬퍼하거나 분통을 터뜨릴 일은 없다는 겁니다. 파리에서 부임한 프랑스어 교사는 슬퍼할지 몰라도요. 당시 알자스의 상황과 알퐁스 도데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두 블로그를 참조하세요.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알 수 있듯이 알자스는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프랑스 보다 독일과 더 가깝습니다. 와인 문화도 독일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죠. 와인 양조에 사용하는 포도는 프랑스에서 주로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리슬링(Riesling), 게부르츠트라미너(Gewurztraminer), 실바너(Sylvaner)처럼 독일 와인에서 사용하는 품종을 더 많이 키웁니다. 물론 북쪽에 있다 보니 추위에 강한 리슬링을 많이 재배하기도 하지만, 독일 와인의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병 모양도 보르도나 부르고뉴 스타일이 아니라, 독일처럼 가늘고 길며 어깨가 없는 형태입니다. 병 색깔도 독일처럼 초록색인 것이 많습니다. 또, 와인 레이블에 포도 품종을 적는 것도 같습니다.
다만 독일 와인은 고급일수록 잔당이 있고 알코올 도수가 7.5~11% 정도이지만, 알자스 와인은 완전히 발효해서 알코올이 11% 이상이며 향이 강하고 드라이한 것이 차이점입니다. 이것은 독일과 프랑스의 와인 문화가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2. 와인의 맛과 향
도멘 트라페의 베블렌하임 리슬링(Beblenheim Riesling)은 국내에서 찾기 쉽지 않은 알자스 리슬링 100%의 AOC 와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이트 와인이 레드 와인보다 인기가 적고, 그나마 사람들이 찾는 화이트 와인은 샤르도네나 쇼비뇽 블랑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리슬링 와인은 인기가 없고, 알자스처럼 익숙하지 않은 지역의 와인은 더더욱 찾지 않는 상황이죠. 하지만 리슬링은 최고의 화이트 와인용 포도 중 하나이며, 드라이한 리슬링 와인의 맛과 향은 꽤 매력 있습니다.
첫 향으로는 배와 흰 복숭아처럼 하얀 속살을 가진 과일 향이 나오며, 리슬링의 특징적인 향인 석유와 돌판 향을 맡을 수 있습니다. 살짝 덜 익은 백도처럼 싱그럽고 향기로운 향과 가볍고 상큼한 맛이 일품이네요. 시간이 좀 지나면 산미가 더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날카로운 신맛이 아니라 둥글둥글하고 부드럽습니다. 아울러 버터 향과 아몬드 같은 견과류 향도 약하게 흘러나오죠. 시간이 흐를수록 맛이 진해지며 1시간 정도 후엔 쓴맛도 살짝 나옵니다.
산도가 제법 높은 것을 제외하면 샤블리 와인과 느낌이 비슷합니다. 아마 이 와인의 생산자인 도멘 트라페(Domaine Trapet)가 부르고뉴에 있어서 비슷한 스타일로 양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포도로 만든 와인이지만, 자신들에게 익숙한 맛과 향을 갖도록 만들지 않았을까요? 연간 5,000병 가량 생산합니다.
크림 소스처럼 부드러운 소스를 얹은 농어와 연어 스테이크, 중국식 해산물 요리, 생선회와 잘 맞습니다. 간장과 설탕으로 달게 양념한 요리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