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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럼(Rum)이로되 럼이 아니로다 - Ron Zacapa 23, Ron Zacapa XO

까브드맹 2010. 8. 9. 11:32

(자카파를 만드는 Industrias Licoreras de Guatemala는 자카파 외에 다양한 주류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industriaslicorerasdeguatemala.com/home/)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진, 데낄라와 함께 서양의 대표적인 증류주 중 하나인 럼(Rum)은 사탕수수를 원료로 만드는 술입니다. 일찍이 럼은 대영제국 해군의 술이며 해적들의 술로 이름을 날렸는데,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전사한 후에 영국 함대가 영국으로 귀환할 때까지 제독의 유해가 썩는 것을 막으려고 럼이 담긴 오크통에 보관한 일은 럼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다양한 증류주 중에서 럼이 해군의 술, 해적의 술, 바다 사나이의 술이 된 것에는 재미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보통 배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꽤 낭만적 일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승객일 때이고, 선원으로 배를 타면 고생문이 훤히 열린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기계 장치가 많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거대한 배를 운항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일일이 손으로 조작해야 하는 17~18세기의 전근대적인 범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범선을 순조롭게 움직이려면 많은 사람이 들러붙어 힘겨운 노동을 해야 했고, 잠과 휴식을 취할 땐 배 안의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대끼며 지내야 했죠.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에 온몸이 끈끈해지더라도 식수도 넉넉지 않은 판에 목욕이나 샤워는 생각하기도 힘들고,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로 배가 흔들려 멀미 나고 구토가 일어도 참아내야 했습니다. 때로는 태풍이 몰아쳐 사람이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심하면 배가 가라앉아 선원과 승객 모두 물고기와 입맞춤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해군이라면 해적이나 적국의 함선과 싸우다 죽거나 다칠 수도 있으니 고생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거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상적으로 잘 먹고 사는 사람 중에 선원이나 해군이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바다 저 멀리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부 모험가를 제외하고 말이죠. 육지에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거나 일확천금을 노리고 배를 타는 일이 많았는데, 합법적으로는 상선의 선원이 되는 것이고 불법적으로는 해적선의 해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해군에는 되도록 입대하려 하지 않았는데, 군대이다 보니 상선이나 해적선보다 훨씬 고생스럽고, 통제된 생활에 월급은 박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 해군은 모병자만으로는 부족한 인원을 채워 넣기 위해 종종 항구로 쳐들어(?)가 청년이고 장년이고 가리지 않고 잡아 들여 강제로 해군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못하면 필요 인원을 확보할 방법이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죠.

아무튼, 당시 선원이나 해군은 막장 인생 + 강제 징용자들로 구성되다 보니 분위기가 뒤숭숭하고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들을 통제하려고 규율도 엄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해야 무사히 항해할 수 있었는데 어르는 수단이 가혹한 규율과 채찍질이었다면 달래는 수단은 '술'이었습니다.

(Cat o'Nine이라 불린 당시의 채찍)

보급에 문제가 없다면 영국 해군은 규정상 일 인당 매일 1/2파인트의 그록(grog, 럼과 물을 섞은 것)과 1갤런의 맥주를 보급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로 환산하면 그록은 284ml, 맥주는 3,785ml 정도가 되죠. 매일매일 이 정도라면 상당한 양이죠? 물론 이건 보급이 잘 되었을 때고 원활하지 않은 때가 더 많았죠. 그런데 우습게도 많은 사람이, 단순히 '매일 술을 마실 수 있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영국 해군에서 채찍질 체벌과 비슷한 수준의 벌이 바로 '그록 배급 중지'였습니다. 그 정도로 당시 뱃사람에게 술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군에 입대시키기 위한 유혹 수단으로서 술은 그 역할을 톡톡히 했죠.

유혹하고 달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술은 선상 생활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반쯤 썩어, 마실 수 없게 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주는 첨가보조제'였기 때문이죠. 요즘은 식수를 금속제 통에 넣어두고 관리를 잘하므로 상할 일이 별로 없지만, 전 근대 시대에는 식수 보관 설비가 나무통뿐이었습니다. 와인과 맥주 같은 주류도 마찬가지였는데, 구하기 쉬운 나무로 튼튼하게 만들 수 있고, 굴릴 수 있어서 이동도 쉬웠기 때문이죠. 나무통은 로마 시대부터 천년이 넘도록 유럽에서 가장 널리 사용한 운송 설비이자 보관 설비였습니다.


문제는 식수를 나무통에 넣고 뜨거운 햇볕 아래서 항해하다 보면 몇 개월도 안 돼 물이 상하고 푸른 부유물이 둥둥 떠다니는 상태가 돼버리는 것이었죠. 이것은 나무통의 미세한 틈새에서 자라던 각종 세균과 이끼 같은 것이 햇볕을 받아 따뜻해진 고인 물속에서 마구 번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몰랐기에 막을 방법이 없었고, 장기 항해에서 이런 물이라도 마시려면 술을 타서 알코올로 각종 균을 죽이고 역한 맛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6~19세기의 대양 항해선에는 반드시 술이 필요했고, 필수적인 보급품으로 배에 많이 실렸습니다.

당시 제일 저렴한 주류는 네덜란드에서 처음 만든 '진'이었습니다. 호밀로 만드는 진은 재료가 흔했고, 위스키나 브랜디처럼 오크통에서 장기 숙성할 필요도 없어서 다른 주류에 비교해 매우 쌌습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은 진 대신 '럼'을 해군용 주류로 선택했죠. 왜냐하면, 영국 해군은 진의 패악에 질릴 대로 질렸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진은 네덜란드에서 살던 윌리암 3세가 1689년에 영국 왕위에 올랐을 때, 네덜란드에서 작전 중인 영국군을 통해 영국에 전해졌습니다. 영국 왕으로 즉위한 윌리암 3세는 프랑스 와인과 브랜디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했고, 진은 브랜디를 대신할 술로 영국 사회에 급속도로 퍼졌습니다. 영국에 퍼진 진은 얼마 안 있어 큰 사회문제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진의 가격이 너무 싸서 하류층에서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죠. "1페니면 취할 수 있고, 2페니면 죽을 정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저렴해서 싼값에 잔뜩 취할 수 있었던 서민들은 진을 "로얄 파버티(Royal Poverty, 왕 같은 가난)"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런던 시민이 마신 진의 양은 1주일에 2파인트(1.12 리터)였는데, 이 수치는 성인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와 갓난아기를 다 합친 숫자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시내 곳곳마다 진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이 즐비했고, 영국 정부에서는 진으로 인한 사회 문제를 없애려고 "진 금지법"을 1743년에 제정하려고 했지만, 폭동이 일어나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극작가인 헨리 필딩은 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진이야말로, 대도시 인구 수십만 명을 해치는 해악이다. 이 독한 술에 접한 사람들은, 지독한 주정뱅이가 되어, 이 술을 다시 사기 위한 돈조차 제대로 벌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모든 수치심과 공포심도 없애버려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와 뻔뻔스러움을 낳게 한다." 

이런 상황이기에 군대에 진을 보급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적당했겠지만, 영국 정부는 이 지긋지긋한 술을 도저히 군대의 보급품으로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영국은 카리브해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활발하게 경영했고, 설탕을 생산하고 남는 당밀 찌꺼기로 만드는 증류주인 럼주의 생산과 유통도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에서는 진을 대신해 럼을 군대의 공식 주류로 보급합니다.  

럼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글이 너무 길었군요. 17~19세기 영국인들의 음주습관과 선원들의 생활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나시카님의 블로그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우리나라와 18~19세기 영국의 공통점

머나먼 항해를 위한 물과 술 이야기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해군과 선원들에게 퍼진 럼은 자연스럽게 싸구려 술이란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싸게 싸게 취하려 할 때 마시는 것이지 위스키나 브랜디처럼 고급 주류로 인식되진 않았습니다. 국내에서도 칵테일의 기본주로 사용될 뿐이지 제대로 만든 럼은 많이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인기 있던 캡틴 큐는 럼이라고 하지만, 초기에 럼을 일부 섞어서 만들었을 뿐이며 최근엔 아예 럼 향을 첨가해서 만든다고 합니다. 또 삼바 25는 럼이라지만 25도로 순하게 만들었고, 최근엔 시중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국내에서 럼은 인기가 없어 일부 바에서 조금 취급할 뿐입니다. 럼을 마시고 싶으면 이런 바를 수소문해서 찾아갈 수밖에 없죠. 


이런 가운데 사탕수수로 제대로 만든 럼인 자카파(Zacapa)의 시음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음 후에 느낀 것은 자카파는 사탕수수를 재료로 만든 것을 제외하면 럼과 그다지 공통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럼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낸 후 남은 당밀 찌꺼기에 물을 붓고 발효해서 만드는 술입니다. 당밀 찌꺼기는 단당으로 이뤄져 있어서 위스키나 맥주처럼 당화(糖化)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오크통 숙성? 그런 것도 없습니다. 속성으로 발효해서 증류기에 넣고 증류하면 되는 간단한 술이죠.

하지만 자카파는 최초의 과정부터 남다릅니다. 우선 재료가 당밀 찌꺼기가 아니라 사탕수수 용액입니다. 이 용액을 버진 슈가 캐인 허니(Virgin Sugar Cane Honey)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사탕수수 초출당(初出糖)' 정도 됩니다. 아무튼, 사탕수수에서 처음으로 뽑아낸 설탕 용액이죠. 이 설탕 용액에 효모를 첨가하는데 평범한 효모가 아니라 파인애플 표면에서 자라는 특별한 효모랍니다. 효모를 넣은 설탕 용액을 5일간 발효하면 근사한 사탕수수 술이 만들어지는데, 이 술을 연속식 구리 증류기에 넣어서 증류합니다. 증류기를 거쳐 나온 자카파는 숙성을 거쳐 향과 맛이 늘어나는데, 숙성 장소는 평범한 곳이 아니라 해발 2,300m의 서늘한 산중입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숙성하는 이유는 아마도

•저온에서 천천히 숙성함으로써 깊은 맛과 향을 늘리고

고온으로 인해 휘발되어 날아가는 알코올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라고 봅니다. 과테말라는 북위 14도에 위치해서 적도와 매우 가깝습니다. 해수면의 연평균 온도가 25~30도에 이르므로 저지대에서 숙성하면 증발하여 날아가는 알코올의 양이 너무 많아져 장기 숙성할 때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게 되죠. 

숙성할 때는 평범한 방식을 쓰지 않고 스페인의 셰리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하는 솔레라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솔레라 시스템은 같은 크기의 통들을 숙성 연수 별로 층층이 쌓은 다음, 수평과 수직으로 파이프를 연결해 제일 오래 숙성된 최하단의 술통에서 일정한 양만을 빼서 병에 넣는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블렌딩이 이루어집니다. 솔레라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은 

숙성 기간이 다양한 술이 섞여서 매년 품질에 따른 맛의 변화 없이 고유한 맛을 유지할 수 있고

새로운 술을 통에 담은 후 오래 숙성할 필요 없이 맨 아래 통에서 새로 담은 양만큼 바로 숙성된 술을 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자카파 23은 6년에서 23년까지 다양하게 숙성한 술이 혼합되고, 자카파 XO는 6년에서 25년까지 숙성한 술이 혼합됩니다. 그런데 자카파는 오랜 기간 숙성하면서 항상 같은 오크통에서 숙성하지 않고 아래와 같이 다른 종류의 오크통으로 옮기면서 숙성합니다.

버본 위스키를 만들던 오크통 → 셰리를 숙성한 오크통 → 스페인의 페드로 히메네즈(Pedro Ximenez) 셰리 와인을 숙성한 오크통

자카파 23은 일단 여기까지 숙성합니다만, XO는 마지막으로 꼬냑을 숙성한 프렌치 오크통에서 한 번 더 숙성합니다. 그후 메링(Marrying)이라는 마지막 과정을 거치는데 각각의 솔레라 시스템에서 나온 술의 색과 아로마, 맛을 평가한 다음 혼합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만든 자카파는 매우 독특한 맛과 향을 갖게 되죠.

자카파 23의 향을 맡으면 처음엔 코를 찌르는 듯한 알코올과 탄 캐러멜 향이 나옵니다. 잠시 뒤 메이플 시럽 같은 향이 나는데, 시럽을 바짝 졸여서 약간 태우면 나는 향과 비슷합니다. 그을린 오크의 나무 향이 그윽하게 나오며, 초콜릿과 스카치위스키 향도 조금 나옵니다. 홈페이지에는 아몬드와 스파이시한 향신료 향을 맡을 수 있다고 했지만, 강한 알코올 때문인지 정확히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맛은 매우 달고 진하며 부드럽습니다. 40도의 알코올 때문에 입안에서 '확' 하고 퍼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단풍나무 시럽처럼 달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이 매우 고급스럽습니다.

23을 시음하면서 얼음 1조각을 넣어서 마셔보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위스키 같은 다른 증류주는 대개 얼음을 넣으면 시원해지면서 도수가 낮아지고 마실 때의 부담도 줄지만, 맛이 밋밋해지고 날카로워지곤 합니다. 하지만 23은 맛이 옅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훨씬 부드러워지면서 아주 마시기 편하게 바뀝니다. 이런 부분도 다른 증류주와 차별되는 독특한 점이죠.

XO는 23과는 달리 처음에 코를 찌르는 듯한 향은 없습니다. 그윽하고 우아한 향이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마치 꼬냑 같더군요. 아마 마지막에 꼬냑을 숙성했던 프렌치 오크통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매우 진하고 부드러우며 단맛이 강합니다. 너무 진하고 부드러워서 제 입엔 좀 느끼할 정도더군요. 마치 혀 위에 기름 막이 한 겹 낀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요? 23에서 나오는 향에 더해 토종꿀의 향 조금과 탄 고무 내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시음할 때 마셨던 XO가 3일 전에 한 번 오픈해서 사용했던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도 완전히 열리지 않아 향과 맛이 최고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시음에 사용한 후에 마개를 막아두긴 했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꺾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 모습을 아직 다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카파 XO의 힘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을 들여서 다시 한번 시음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자카파 홈페이지는 아래의 링크를 따라 들어가시면 됩니다. 

자카파 홈페이지

자카파 23 페이지

자카파 XO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