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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와인 일반

[기초] "오래 묵은 와인"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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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에 많이 퍼져 있는 와인 속설 중 하나가 "오래 묵은 와인이 맛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와인이 오래 묵을수록 맛있어지진 않습니다. 와인 중엔 틀림없이 오래 숙성할수록 점점 맛이 좋아지는 것도 있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오히려 맛이 안 좋아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옛날엔 와인을 보존하는 방법이 발달하지 못해서 1년이 넘도록 제맛을 유지하는 와인이 드물었습니다. 대부분 수확 후에 알코올 발효가 끝나면 짧은 기간 숙성한 다음 이듬해 봄부터 마시기 시작했죠. 더운 여름을 지나면 와인은 슬슬 식초처럼 신맛이 강해집니다. 이 무렵이 되면 물을 타서 음료수처럼 마시곤 했죠. 중세와 근대의 베네치아 조선소에선 노동자들에게 물을 탄 와인을 음료수로 제공했는데 물과 와인의 혼합 비율 때문에 조선소와 티격태격했다는 기록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몇몇 와인은 1년 이상 제맛과 향을 유지했지만, 단맛이 강한 스위트 와인이나 브랜디를 부어서 알코올 도수를 높인 강화 와인을 빼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와인은 극히 적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그리스에선 와인에 송진을 넣어서 산화와 변질을 막으려 했지만, 그것도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와인이 오늘날처럼 긴 수명을 갖게 된 것은 세 가지 물건의 발명, 혹은 발견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 세 가지란,

① 유리병의 발명

와인의 변질은 대부분 공기 중의 초산균이 와인에서 들어가 번식하기 때문입니다. 초산균이 들어가도 산소가 없으면 번식할 수 없지만, 옛날에 와인을 보관했던 오크통은 와인이 새는 것은 막을 수 있어도 나무 틈 사이로 산소가 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리병을 발명하면서 외부에서 스며드는 산소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게 되었죠.

② 코르크 마개의 발명

코르크 마개를 발명하기 전에는 와인병의 마개로 기름을 칠한 헝겊을 두른 나뭇조각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마개로는 아무래도 병이나 와인 단지 입구를 완벽하게 밀봉할 수 없었고, 자연히 산소가 병 안으로 들어가 초산균과 결합하게 되었죠. 하지만 탄력 있는 코르크 마개로 공기를 거의 차단할 수 있게 되면서 와인 보관 기간은 비약적으로 늘어납니다. 

코르크 마개로도 공기를 100% 차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통하는 와인의 10%는 사실 맛이 조금 간 것이라고 하죠. 이런 이유로 신대륙을 중심으로 공기를 100% 차단할 수 있는 스크류 캡을 사용하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장기 숙성이 필요 없는 와인을 중심으로 사용 비율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③ 이산화황(SO2) 같은 산화 방지제의 발견

미생물학과 화학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왜 술이 발효하고 변질하는지 알게 됐고, 이런 작용을 멈출 수 있는 물질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산화황으로 와인에 들어간 각종 미생물을 살균하거나 활동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죠. 이로 인해 와인의 수명은 더욱 늘어납니다. 

오늘날 시장에서 유통되는 와인은 내추럴 와인 같은 몇몇 와인을 제외하곤 이산화황 같은 항산화제가 빠짐없이 들어갔습니다. 물론 인체에 해가 안 될 정도로 사용량을 엄격하게 통제하죠. 이산화황에 민감한 사람을 위해 레이블에 경고문을 부착하기도 합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와인의 수명도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수명이 짧은 와인이 있습니다. 이것은 와인에 들어간 여러 성분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죠. 인체에 해가 없도록 제한된 양의 이산화황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와인의 수명을 결정짓는 것은 다음의 네 가지 성분입니다.

○ 알코올 : 알코올의 도수가 높을수록 와인은 오래 갑니다. 막걸리보다 소주를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알코올의 함량 때문이죠. 

○ 당분 : 설탕이나 꿀은 썩지 않죠? 당분이 많으면 미생물이 활동할 수 없으므로 와인의 수명도 길어집니다.

○ 산도 : 식초처럼 산 성분이 많으면 미생물이 활동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산도가 높은 와인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 탄닌 : 레드 와인에 들어있는 탄닌은 와인의 구조를 튼튼하게 만들고 살균 작용도 해서 와인이 쉽게 변하지 않도록 해줍니다.

위의 네 요소가 충실하게 들어간 와인은 오래도록 맛과 향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몇 년 못가서 맛이 변해버리게 되죠. 잘 익은 포도로 만든 고급 와인일수록 위의 네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서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오래도록 숙성하면서 와인 성분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며 맛과 향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평범한 와인들은 너무 오래 보관하면 품질이 떨어질 수 있죠. 그래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와인과 그렇지 않은 와인을 구분해서 둘 것은 두고 마실 것은 마셔줘야 합니다. 와인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분류해보면

① 레드 와인

 - 5만 원 이하의 와인이라면 빈티지에서 5~6년 이내에 마셔주는 것이 좋습니다.

 - 까베르네 소비뇽이나 시라로 만든 와인은 비교적 오래 가지만, 다른 품종은 품질이 아주 좋지 않으면 장기 보관이 어렵습니다.

 - 그르나슈가 많이 들어간 와인은 빨리 마셔주는 것이 좋습니다.

② 화이트 와인

 - 소비뇽 블랑 와인은 오래 보관하지 말고 되도록 빨리 마셔야 합니다.

 - 샤르도네 와인은 8만 원 이상이고 오크 숙성했다면 오래 보관할 만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빨리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 리슬링 와인은 산도와 당도가 높고 구조도 튼튼해서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화이트 와인은 빨리 마셔야 하는 와인이 90% 이상입니다.

③ 스위트 와인과 강화 와인

 - 아이스 와인처럼 단맛이 강한 스위트 와인은 장기 보관이 가능합니다.

 - 알코올 도수가 높은 강화 와인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습니다.

위의 분류가 100% 들어맞진 않으니 바로 마실 것이 아니라면 구매할 때 와인 샵의 매니저에게 얼마만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좋겠죠.

와인 품질도 장기숙성력에 영향을 미치지만,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은 와인의 보관 환경입니다. 같은 와인 생산자가 만든 같은 빈티지의 와인이라도 환경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같은 빈티지의 와인을 비슷한 시기에 마셨는데 어떤 것은 맛있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한 것은 와인을 마시다 보면 숱하게 겪는 일이죠. 와인을 오랫동안 보관하려면 아래와 같은 환경을 갖추는 것이 좋습니다.

① 직사광선이 내리쬐지 않는 어두운 곳 

② 온도가 10도 이하이고 변화가 거의 없는 곳

③ 진동이 없는 곳

④ 건조하지 않고 충분한 습기가 있는 곳

이런 요소가 잘 갖춰진 대표적인 장소가 동굴이나 땅속 깊숙한 지하실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와인 저장고는 지하실이 널리 이용된 거죠. 아파트가 많은 우리나라에선 지하실이 없으므로 와인 셀러라고 부르는 와인 전용 냉장고를 쓰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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