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론(Clone)이란?
와인을 마시면서 포도 품종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clone'이라는 단어가 종종 나옵니다. 영어로 복제를 뜻하는 '클론' 품종에 관해 얘기해 보죠.
포도알에는 씨가 들어있지만, 포도나무는 씨로 번식시키지 않습니다. 씨를 심기보다 포도 줄기를 자른 꺾꽂이로 번식시키는 방법이 훨씬 더 수월하기 때문이죠. 꺾꽂이로 번식시키는 또 다른 이유는 와인 생산자 처지에서 재배하는 포도나무에 열리는 포도의 특성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는 바람을 타고 자체적으로 수분(自家受粉)할 수 있지만, 다른 포도나무의 꽃가루가 달라붙어서 수정이 일어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죠. 이러면 새로 열리는 포도의 씨앗에는 다른 포도나무의 DNA가 섞여 들어갑니다. 그러면 1대까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여러 대가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새로운 특성을 가진 포도가 나타날 수 있는데, 이것은 포도의 맛과 향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됩니다.
하나의 생명체에 들어있는 DNA가 다양해지는 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형질을 갖게 해주므로 생물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만, 와인 생산자에겐 달가운 일이 아닙니다. 품종에 맞게 재배법과 양조법을 완성했는데 포도 특성이 자꾸 바뀌면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재배법과 양조법을 다시 연구해야 하는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죠. 이렇게 되면 와인을 만들 때 기대하는 맛과 향을 맞추기 힘들고 품질 유지를 하기도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자면 탄닌이 많은 와인을 만들고 싶어서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심은 후에 포도 씨앗으로 계속 번식을 시켰더니 어느새 다른 품종의 DNA가 섞여 들어가서 몇 대가 지나지 않아 포도의 탄닌이 많이 줄어드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서 자라난 가지를 잘라서 꺾꽂이로 번식시키면 이런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개체가 다르지만 새로 심은 가지에서 열리는 포도의 특성은 모체가 되는 포도나무의 것과 똑같기 때문이죠. 그래서 와인 생산자는 포도의 특성이 변할까 봐 걱정할 필요 없이 항상 균일한 맛과 향을 가진 와인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이 두 종류의 포도를 교배해서 새로운 품종을 만들 때는 꽃가루를 암술에 묻혀서 열린 포도의 씨앗으로 번식시키지만, 일단 좋은 특성을 가진 새 품종을 만들면 그 후에는 꺾꽂이로 묘목을 늘려나갑니다. 따라서 하나의 포도밭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들은 나무 한 그루에서 나온 분신인 셈입니다.
하지만 꺾꽂이로 번식시켜도 기후가 다르고 토양이 다르면 포도의 특성은 미묘하게 변화합니다.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질 때마다 유전 정보가 그대로 복제되어야 하지만, 때때로 돌연변이 같은 상황이 일어나서 원래의 나무와 미묘한 차이가 생기는 거죠.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응하면서 변이가 일어나는 생명체의 공통된 특성 때문인데, 포도는 그런 특성이 좀 더 강합니다. 이러한 미묘한 변화가 계속 쌓이면 어느새 같은 품종이지만 뚜렷한 차이가 나는 새로운 품종이 탄생합니다. 이런 포도를 "클론 품종"이라고 합니다.
클론이 많이 발생하는 포도는 대개 DNA 구조가 불안정합니다. 피노 누아(Pinot Noir)나 람부르스코(Lambrusco) 같은 포도가 대표적이며 까베르네 소비뇽도 만만치 않은 숫자의 클론이 있습니다. 미국의 델리카토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337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337번째 클론으로 만들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거라고 하니 까베르네 소비뇽 클론 품종은 최소 337 가지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탈리아의 몬탈치노(Montalcino) 마을에서 재배하는 브루넬로(Brunello) 포도도 산지오베제(Sangiovese)의 클론 품종이죠.
이렇게 품종의 변이가 계속되어서 클론이 생기다 보면 돌연변이가 일어나 아예 새로운 특성을 가진 품종이 탄생합니다. 피노 그리(Pinot Gris)와 피노 블랑(Pinot Blanc)이 그런 새로운 품종들로 둘 다 피노 누아의 '돌연변이 클론(Mutant Clone)'으로 분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