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일반

[수다] 와인 공부에 관한 생각

까브드맹 2018. 6. 15. 08:00

와인 테이스팅의 모습

와인을 처음 마시기 시작했던 무렵의 일입니다. 하루는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추석 선물로 받았다면서 와인 2병을 보여주더군요. 제가 와인 동호회에 나간다고 했더니 선물로 받은 와인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엔 와인을 조금도 몰랐었지만, 그냥 아는 대로 들은 대로 설명을 해줬죠. 친구는 설명을 다 듣고 난 다음 감사의 표시였는지 어쨌는지 둘 중 한 병을 가져가라고 하더군요. 와인은 두 병 모두 바르통 앤 게스띠에르(Barton & Guestier), 줄여서 B&G라고 부르는 보르도 네고시앙(Negociant)의 레드 와인이었습니다.

바르통 앤 게스띠에르 보르도 블랑
(금색 바탕에 파란색이 들어간 레이블이 인상적입니다. 와인 매장에서 종종  보셨을 겁니다)

똑같은 레이블에 다만 "Medoc"과 "Bordeaux" 두 글자만 다르게 적혀있더군요. 기왕이면 더 좋은 것을 골라야 하므로 조금 망설인 끝에 "Medoc"이라고 표시된 와인을 골랐고 결과적으론 더 좋은 것을 고른 셈이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집어 들었겠지만, 와인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던 당시엔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 알아볼 눈도 지식도 전혀 없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죠.

아마 슬슬 와인에 관심을 두고 매장에서 구매해보려는 분들도 한 번쯤 이런 문제에 직면한 적이 있을 겁니다. 매장에 갔더니 전에 마셔봤던 와인은 없고 처음 보는 와인만 하나 가득 한데... 이럴 때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난처했던 기억은 와인에 관심을 갖게 되면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요. 와인을 살 때 기왕이면 더 맛있고 좋은 걸 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겠지만, 처음 보는 수많은 와인 중에서 괜찮은 와인을 고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죠. 더구나 프랑스 같은 구세계 와인은 품종과 등급이 지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와인을 고를 때 항상 애로사항으로 작용하곤 하죠. 그래서 구세계 와인을 제대로 즐기려면 지리 공부가 약간 필요합니다.

보르도 와인을 구분하는 방법에 관해 간단히 얘기해보죠.

보르도 지역의 지도
(보르도 지역의 지도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f/Weinbaugebiete-frankreich-bordeaux.png)

우리나라 경기도를 28시 3군으로 분류하듯 보르도도 여러 구역으로 나뉩니다. 또한, 와인 생산지 분류는 일반 행정구역과 일치하지 않기도 합니다. 경기도에서 재배하고 수확한 쌀에 '경기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듯이 보르도에서 정해진 포도를 수확해서 만든 와인에는 레이블에 "Appellation Bordeaux Controlee"라는 표시를 달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일에 EU 규정이 바뀌면서 2009 빈티지부터는 "Appellation Bordeaux Protegee"라고 표시된 것도 있죠.

샤토 뒤 록
(가운데에 "Bordeaux"라는 글씨가 있고 그 아래에 "Appellation Bordeaux Controlee"라고 흘림체로 적 혀있습니다)

쌀 포장지에 적힌 '경기미'라는 글자를 보고 소비자가 쌀의 출처와 품질을 짐작할 수 있듯이 "Appellation Bordeaux Controlee"라는 표시를 보고 이 와인을 어떤 곳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한 겁니다. 

기후와 토양의 소산인 농작물은 산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인천광역시 근처의 과수원에서 키운 배를 담은 상자에 배의 명산지인 '나주 배'나 '성환 배'라고 적어서 판다면 사기가 되겠죠?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인의 재료인 포도는 지역별로 잘 자라는 품종이 따로 있고 품질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산 와인이 어떤 곳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정보는 꼭 필요하며, 프랑스 정부는 레이블에 "Appellation Bordeaux Controlee"라는 표시를 붙여줘서 와인의 생산지를 보증해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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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경기미여도 김포나 이천 쪽 쌀이 더 좋잖아요? 쌀 포장지를 보면 '김포미'나 '이천미'라고 적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토질과 기후가 좋은 곳에서 키운 품질 좋은 쌀이라는 것을 보여줘서 차별화를 꾀하는 겁니다.

강화섬 고시히까리 쌀 포장지
(강화 섬에서 나온 쌀입니다. 이렇게 쌀도 생산지를 표시하는 것이 많습니다. 고시히카리는 쌀의 품종 입니다)
쌀 포장지 뒤의 품질 표시 사항
(포장지 아래에는 <품질표시사항>이라고 해서 쌀에 관한 각종 정보를 표시했습니다. 와인 레이블에 적힌 수많은 글자와 숫자도 이런 것과 비슷한 정보들입니다)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르도에서 특히 유명한 '메독(Medoc, 위 지도의 1번과 2번)'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을 겁니다. 만약 메독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면 "Appellation Medoc Controlee"라는 표시를 붙입니다.

샤토 블래냥 메독
("저는 메독&nbsp; 출신이에요~")

메독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고 무조건 달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 와인법에 정해진 규정에 맞게 생산한 와인에만 달아주죠. 만약 메독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었어도 규정에 맞지 않으면 "Appellation Bordeaux Controlee" 표시를 붙이거나 더 낮은 등급 표시를 붙입니다. 

메독은 두 지역으로 나눕니다. 하류의 '바-메독(Bas-Medoc(위 지도의 1번)'과 조금 상류의 '오-메독(Haut-Medoc, 위 지도의 2번)'이죠. 그런데 '바(Bas)'라는 단어는 '낮은', '하류'라는 뜻 말고도 '질이 낮은', '하품(下品)의'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메독 와인은 레이블에 'Bas-Medoc'이라고 표시하지 않고 'Medoc'이라고 적습니다. 실제로도 바-메독 와인은 오-메독 와인보다 일반적으로 품질이 떨어지죠. 하지만 오-메독에서 만드는 와인은 항상 "Appellation Haut-Medoc Controlee"'라고 표시합니다.

샤토 르 파라 오-메독 와인
(이렇게 'Haut'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오-메독 지역 중에서 토양과 기후가 좋아서 품질이 특히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이 몇 군데 있습니다.

① 쌩-테스테프(Saint-Estephe) : 위 지도의 3번

② 뽀이약(Pauillac) : 위 지도의 4번

③ 쌩-줄리앙(Saint-Julien) : 위 지도의 5번

④ 마고(Margaux) : 위 지도의 8번

⑤ 리스트락 메독(Listrac Medoc) : 위 지도의 6번

⑥ 물리(Moulis) : 위 지도의 7번

의 여섯 마을이죠. 이곳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드는 와인은 품질이 다른 오-메독 와인과 구분될 만큼 뛰어나서 레이블에 마을 이름을 표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뽀이약 마을에서 규정에 따라 생산한 와인은 "Appellation Bordeaux Controlee"나 "Appellation Haut-Medoc Controlee" 대신 "Appellation Pauillac Controlee"라는 표시를 붙여서 더 좋은 와인을 만드는 마을에서 생산한 와인임을 증명해주는 것이죠.

뽀이약 와인인 샤토 레 오 드 뽕테 1998

이렇게 더 작은 행정구역에서 만든 와인일수록 일반적으로 품질이 더 좋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프랑스의 낯선 지명을 외워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내가 산 와인이 프랑스 어느 곳에서 만든 와인인지 알 수 있고, 품질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프랑스의 낯선 지명을 쉽게 외우거나 파악할 방법은 없습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알아가거나 집중적으로 공부하거나 둘 중에 하나죠.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만약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쌀에 관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전국의 쌀 생산지를 단번에 외우거나 알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어느 정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는 있어도 각 시, 군의 이름과 위치는 그냥 외우는 수밖에 답이 없을 겁니다. 결국, 약간의 공부는 어쩔 수 없다는 거죠.

공부하지 않아도 와인을 얼마든지 맛있게 마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와인을 더 재미있게 마실 수 있죠. 그건 규정을 몰라도 축구 경기를 재밌게 볼 순 있지만, 규정과 역사를 알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