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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값싼 스페인 와인의 미덕

까브드맹 2018. 4. 2. 20:28

스페인산 데일리 와인들의 사진

대형 마트의 와인 코너에 가면 4,000~9,000원 정도의 가격에 판매하는 와인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와인은 고급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가격은 아주 싸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죠. 그래서 이런 와인을 사는 분들은 점원에게 "이 와인은 왜 이리 싸냐?" 또는 "뭔가 이상한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을 종종 던지곤 합니다. 소주나 막걸리도 아니고 와인을 이렇게 싸게 팔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이런 저렴한 와인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칠레, 호주 등등 세계 각지에서 생산하지만, 국내에 수입된 와인 중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스페인 와인입니다. 다른 나라 와인와 비교해서 유독 값싼 스페인 와인이 많이 들어오는 것은 그만큼 가격이 저렴하면서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이죠. 프랑스가 일찌감치 생산량보다 품질 위주로 방향을 잡고 이탈리아도 점차 이런 추세를 따라가지만, 스페인은 아직도 협동조합에서 값싸게 대량 생산하는 와인이 많습니다. 물론 스페인에서도 값비싼 고급 와인을 만듭니다, 하지만 저가 와인과 비교해보면 생산량이 매우 적죠.

저가 스페인 중에선 세관을 통과할 때의 가격이 병당 1달러인 것도 많습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생수만큼 싼 거죠. 이렇게 원가가 싸다 보니 각종 세금이 붙고 수입사, 도매상, 소매상에서 이익을 남겨도 4~5,000원 선에 팔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값싸게 팔리는 스페인 와인이지만, 품질은 나쁘지 않습니다. 레드 와인은 대개 딸기와 라즈베리 같은 붉은 과일 향이 나고 달지 않으며 산도가 강합니다. 탄닌은 아주 적어서 떫은맛을 느끼기 힘들고, 대부분 무게감이 가벼운 라이트 바디 와인이죠. 화이트 와인은 청사과와 덜 익은 포도 같은 싱그럽고 풋풋한 향이 나오고 대개 신맛이 강합니다. 와인을 만들 때 쓰는 포도는 까베르네 쇼비뇽과 메를로, 샤르도네 같은 글로벌 품종이 아니라 아이렌, 비우라, 보발 같은 스페인 토종 품종을 사용하는 일이 많죠.

 

이 와인들은 그냥 마시기엔 별로이지만, 음식과 함께 먹으면 제법 맛이 좋습니다. 개성이 강하지 않아서 음식과 충돌하는 일이 적고, 신맛이 침샘을 자극해서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와인을 특별한 날만 마시는 술이 아니라 일상에서 즐기는 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값싼 스페인 와인의 미덕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미덕은 가격이 매우 헐해서 부담이 없다는 겁니다. 지갑이 얇을 때도 걱정 없이 와인을 살 수 있고, 다른 와인 한 병 살 값이면 네, 다섯 병가량 살 수 있으니 같은 값에 매일매일 와인을 마실 수 있죠.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때 데일리 와인으로 즐기기엔 최고입니다.

두 번째 미덕은 위에 적었듯이 다양한 음식과 두루 맞습니다. 동네 시장에서 닭 한 마리 튀겨서 레드 와인과 마셔도 좋고, 부침개 한 장 사다가 화이트 와인과 마셔도 좋죠. 돼지고기 뒷다리살을 매운 양념과 함께 볶아서 화이트 한 잔 마셔도 나쁘지 않고, 돈가스나 튀김에 레드 와인 한 잔도 제법 괜찮습니다.

세 번째 미덕은 와인을 요리에 써도 아깝지 않다는 겁니다. 파스타를 만들고, 홍합을 삶고, 고기를 양념에 재울 때 와인을 넣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리에 쓰고 남은 와인을 처리하기 곤란할 때가 있죠. 주량이 많은 분이라면 만든 요리와 함께 남는 와인을 비우면 되니까 별문제 없지만, 주량이 약한 분이라면 다 마시지 못하고 아깝게 남기는 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저렴한 스페인이라면 남더라도 아까울 게 없죠. 또 와인이 많이 들어가는 요리를 할 때 비싼 와인을 쓰면 재료비가 엄청나게 올라가지만, 저렴한 스페인 와인은 부담 없이 많이 쓸 수 있어서 좋습니다. 물론 고급 와인을 쓸 때보다 맛은 떨어지지만요.

이외에도 목욕할 때 값싸게 입욕제로 쓸 수 있는 등등 저가 스페인 와인의 미덕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마트에 가거든 와인 코너에 들러서 여러 가지 저가 스페인 와인을 사보세요. 하나 하나 시음한 후 맛과 향이 맘에 드는 와인을 찾으면 데일리 와인으로 삼는 것도 좋을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트에서 와인을 구매하는 손님 중에 이런 저렴한 와인을 즐겨 사가는 외국인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도 2~3일 간격으로 두 세 병씩 말이죠. 제가 보기엔 이런 분이야말로 와인의 생활화를 이룬 분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