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일반

[수다] 프랑스 와인빠의 변명

까브드맹 2018. 3. 10. 17:30

알베르투스 2011 메독 와인

(2010년 5월 27일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로 '정통(正統)'과 '원조(元祖)'가 있습니다. 두 단어를 붙여서 장사하면 매출이 팍팍 뛰기에 식당마다 두 단어를 넣어서 이름짓기도 하고, 서로 자기가 원조하고 하며 싸우기도 하고, 심지어 두 단어를 붙여서 '우리가 정통원조'라고 말하는 곳도 있을 정도죠. 이렇게 '정통'과 '원조'가 난무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통과 원조가 확실한 곳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정통이나 원조라고 주장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있고, 상대방이 함부로 정통이나 원조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도록 법적 조처를 하면 여기저기에서 멋대로 이런 단어를 사용하진 못할 테지요. 프랑스 샹파뉴에서 전통 방식(Methode Traditionale)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에만 '샴페인'을 붙일 수 있듯 말입니다.

정통이나 원조를 좋아하는 소비자 심리는 와인을 고를 때도 영향을 미쳐서 처음 와인을 마시거나 선물용 와인을 고를 때 프랑스 와인을 고르는 분이 꽤 많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와인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 프랑스 와인을 맛보면 달지 않고 텁텁한 맛에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종종 있죠. 그러다 칠레나 호주, 미국의 과일 풍미가 진하면서 떫은맛이 적고 부드러운 와인을 맛보고 나면 신대륙 와인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정통 와인은 프랑스 와인"이라는 생각에 "선물은 프랑스 와인, 내가 마실 와인은 칠레 와인" 하는 식으로 선호하는 와인과 선물하는 와인이 따로따로 노는 일이 일어나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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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첫 잔은 프랑스 와인보다 칠레나 미국, 호주 와인이 더 맛있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어느 쪽 와인이 더 좋고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라 각국의 식문화 때문이라고 봅니다. 와인을 따서 바로 마시느냐, 아니면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마시느냐는 문제도 있고, 달게 조리한 음식을 선호하느냐 아니면 디저트는 달지만 다른 음식은 달게 하지 않는 식습관의 차이로 인해 와인의 맛과 향도 달라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은 전반적으로 달게 조리된 음식이 많고, 와인을 따서 바로 마시는 편이므로 와인도 이에 맞춰 발전해왔습니다. 그래서 코르크를 딴 후 얼마 되지 않아 최고의 맛을 낼 수 있는 와인이 많죠. 반면에 프랑스 와인은 적어도 전채 요리(아페리티프) - 본식(생선요리+고기요리) - 디저트로 이어지는 코스 속에서 음식의 일부분으로 발전했고, 이 과정에서 레드 와인은 전채 요리와 생선요리를 다 먹기까지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마시게 되므로 오픈 후에 어느 정도 시각이 지난 다음 최고의 상태가 되도록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죠. 아울러 달콤한 디저트 와인과 달지 않은 테이블 와인들이 구분되어 발전해온 것도 프랑스 와인 중에서 풍미가 달콤한 와인이 드물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레드 와인은 처음엔 향도 맛도 별로지만, 시간이 흐르면 향이 풍부해지고 마셔도 질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맛이 나는 것이 많습니다. 물론 어느 쪽 와인을 선택하든 자신의 입맛이 가장 중요하며,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은 "즐겁게 와인을 마시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죠. 내 입맛에 맞는 와인이 최고의 와인이고, 가격까지 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겁니다.

저는 프랑스 와인을 좋아합니다. 고가의 그랑 크뤼 와인은 물론이지만, 1~2만 원대의 값싼 AOC급 와인도 좋아하고 몇천 원 정도 하는 지역 등급 와인(Vin de Pays)이나 값싼 테이블 와인(Vin de Table)도 좋아하죠. 사실 저가의 프랑스 와인을 칠레와 미국, 호주 와인과 비교해보면 맛과 향에서 많이 밀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만약 누군가 저렴하고 맛있는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저도 프랑스 와인보다 칠레나 호주 와인을 골라줍니다. 하지만 제가 마실 와인을 살 때는 되도록 프랑스 와인을 고르는데요, 그 이유는 프랑스 와인이 제 입맛에 상당히 편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냥 마실 땐 특별한 개성이 없지만, 음식과 함께할 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음식과 잘 어울리며 맛을 돋워주거든요. 몇 잔 마시면 물리는 신대륙 와인과 달리 몇 잔을 마시더라도 질리는 일이 거의 없는 것도 프랑스 와인의 장점이죠. 음식과 잘 어울리면서 싫증 나지 않는 프랑스산 저가 와인의 매력에 빠지면 다른 곳의 저가 와인에 손이 잘 가게 됩니다. 아, 물론 적어도 두 배 이상 비싼 신대륙 와인을 공짜로 마시거나 같은 가격으로 마실 수 있으면 저도 그쪽으로 손이 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