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옛날 이야기

조선은 폐쇄적인 농촌사회였을 뿐일까?

반응형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2/Sang_P%27yŏng_T%27ong_Bo_%28常平通寶%29_Treasury_Department_Mint_%28戶%29_-_Cropped.png

우리의 인식 속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자급자족적인 폐쇄적인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즉, 상업과 공업을 천시하고 농업만 중시하였기 때문에 그 경제구조는 보잘 것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선은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하여 농업을 중시 여긴 나라입니다. 농업을 모든 산업의 기반으로 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상업이 그렇게 보잘 것 없었을까요?

각 산업 간의 활발한 교류를 나타낼 수 있는 지표 중의 하나가 화폐 경제의 수립 정도입니다. 화폐가 많이 보급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물자교류가 활발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조선 숙종대에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보급됨으로써 조선 후기에 화폐가 대대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총 화폐량은 얼마일까요?
고려대 경제학과 이헌창 교수는 자신의 논문인 <1678-1865년간 화폐량과 화폐가치의 추이> 에서 다음과 같이 조사하였습니다.

"관에서 주조한 동전은 1678-1697년간 약 450만냥, 1731-1798년간 500만냥 이상, 1809-1857년간 6백만냥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화폐로서 기능한 동전총량은 1860년경 1,300~1,500만냥의 범위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전 총량을 18세기초 500여만냥, 1800년경 900만냥, 1860년경 1,400만량으로 잡으면, 그것은 각각 미곡생산량의 10%, 12%, 13% 정도에 해당하며, 국내총생산에 대한 동전총액의 비중은 18세기초에 3% 정도로부터 1860년경에는 4% 정도로 상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말까지는 동전에 대한 신인도의 변화에 따른 유통속도의 변화가 컸기 때문에, 동전가치의 변동이 심하였다. 171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는 단지 물가가 안정된 데에 그치지 않고 錢文이 貴한, 이른바 錢荒 국면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전황의 국면이 이처럼 장기간 지속한 것은 동전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한 반면 그에 상응하게 동전의 공급이 증대하지는 못하고 은화 유통이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1829년부터 신전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전황의 국면으로부터 벗어났다."

주전내역 주전량
------------------------------------------------------------------------------
1678년초~1680년 2월간의 추정 주전량, 1678년 4월부터 行錢 *60만냥
1681년초~1689년 3월간의 추정 주전량 *170만냥
1690년 8월~1695년 9월간의 추정 주전량 *100만냥
1695년 10월~1697년 말간의 추정 주전량 *120만냥
1731년 10월~1732년 9월간 호조와 진휼청의 추정 주전량 *25만냥
1742년 정월부터 수개월간 함흥에서의 추정 주전량 *3만냥
1742~3년간 추정 주전량 *40만냥
1750년 하반기 이래 1~2년간 호조와 ·진휼청의 추정 주전량 *40만냥
1751년 2월~1752년 6월간 三軍門의 주전량 607,000냥
1757~8년간 摠戎廳의 추정 주전량, 1758년 10월부터 行用 *20만냥
1763년~1765년 5월간 禁衛營의 추정 주전량 *40만냥
1772년~1775년 봄간 주전량 *100만여냥
1779년 3월에 공급된 新錢의 추정량 *50만냥
1789년 4월에 공급된 新錢量 90만냥
1791년부터 개시된 주전에 따른 신전의 추정량 *10만냥
1794년 5월경에 공급된 신전량 15만냥
1796년초에 공급된 신전의 추정량 *14만냥
1798년 8월에 공급된 신전의 추정량 *10만냥
1809년 12월에 공급된 신전량 30만냥
1814년초 함경감영의 신전 발행량 65,000냥
1814년 6월에 공급된 신전량 326,400냥
1816년 개성부의 추정 주전량 *8만냥
1818년 11월에 공급된 신전의 추정량 *50만냥
1825년 4월에 공급된 신전량 367,500냥
1829년 10월과 1830년 정월에 공급된 신전량 733,600냥
1832년 정월에 공급된 신전량 784,300냥
1842년 신전의 추정 공급량 *50만냥
1853년 4월, 10월, 1855년 10월, 12월 등에 공급된 신전량 1,571,500냥
1857년 12월에 공급된 신전량 916,000냥

주전은 다양한 관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 추가해야할 것은 은화와 화폐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던 포(布)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포는 화폐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추포는 소액거래에는 편리하였지만, 다른 물품화폐를 구축하는 데에 한계가 컸다. 그래서 16-7세기 토지와 노비의 文記를 보면, 일반 무명, 쌀, 소 등으로 거래되는 일이 많았다. 추포는 지방의 농민에 의해서도 이용되었지만, 서울 등 상업이 번창한 지역에서 특히 활발히 유통되었다. 

추포량은 적었다. 1651년 추포의 통용이 금지되었을 때, 金堉은 쌀 3,000석으로 값을 후하게 치러주더라도 서울의 추포 총량에 해당하는 5만여필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전국의 추포량을 서울의 3배로 잡는다면, 그 구매력은 쌀 만석에 불과하다. 게다가 17세기 중엽부터 화폐로서 추포의 한계가 현저히 드러나고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1650년경에 木品이 더욱 열악해짐에 따라 그 가치가 폭락하여 시장거래에 제약을 가하기도 하였다. 1652년 서울 市上에서는 錢이 아니면 쌀을 살 수가 없어 무명을 가져온 赴役僧軍이 호소한 적이 있었다. 상평통보의 주조가 개시될 무렵에 추포는 화폐로서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

그렇다면 시장의 수는 어떨까요?

"17세기 이후 농촌의 정기(定期) 시(市)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시장경제의 성격에 관한 문제이다. 정기시는 1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여 17세기말이면 5일장 체제로 성립하고, 18세기 후반 전국적으로 1060여 장시 수를 정점으로 그 외연적 확장을 완성하였다. 이 단계에서 조선의 장시 밀도와 상호 연계적 유통망은 중국의 선진지역에 이어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또 17세기 후반부터 금속화폐인 동전(銅錢)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정기시를 연결하는 행상이나 포구와 같은 교통의 요지에서 중개업에 종사하는 객주 등 상인자본이 성장하였다. 서울 등 도시에서도 사상(私商)이 성장하여 전통적인 시전(市廛)체제를 해체, 재편시키고 있었다." (성균관대 이영훈 교수) 

이처럼 많은 양의 화폐가 통용되고 많은 시장이 있었던 조선이 과연 물자교류가 없었던 폐쇄된 농업사회이기만 했을까요? 우리는 조선에 대해 더 많은 연구를 해본 후에 평가를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 그렇다고 조선이 경제적으로 동시대에서 가장 발달한 상업 국가라던가, 스스로 자본주의로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이 완벽히 있었다던가 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틀림없이 당대 중국이나 일본이 상업경제면에서는 조선보다 더 나은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외면한 체 땅만 파먹고 살았던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거죠.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