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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감동어린 향과 맛, 호주 와인의 위대한 정수 - Penfolds Grange Bin 95 1996

까브드맹 2011. 6. 2. 06:00

펜폴즈 그랜지 빈 95 1996

펜폴즈 그랜지(Penfolds Grange)는 호주의 펜폴즈(Penfolds)사에서 생산하는 호주 최고의 와인입니다. 만들기 시작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아직도 그랜지를 능가하는 호주 와인은 나오지 않았죠. 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그랜지를 호주의 "1등급 그랑 크뤼"로 인정하며 가장 수집할 만한 와인으로 생각합니다.

1. 펜폴즈 그랜지

펜폴즈 그랜지는 주로 쉬라즈(Shiraz) 포도로 만들며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약간 섞습니다. 하지만 예전엔 지금과 조금 달랐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펜폴즈 그랜지 1953 빈티지는 두 가지 형태로 만들었는데, 하나는 쉬라즈 87%에 까베르네 소비뇽 13%를 혼합했고 또 하나는 까베르네 소비뇽 100%로 만들었습니다. 

펜폴즈 그랜지 첫 빈티지는 1951년에 펜폴즈사의 와인 메이커 맥스 슈버트(Max Schubert)가 만들었습니다. 1950년에 유럽 여행을 다녀온 슈버트는 와인 품질과 숙성 잠재력에서 보르도의 그랑 크뤼들과 어깨를 겨룰만한 레드 와인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보르도에서 익힌 와인 양조 기법을 구현해서 실험적인 형태로 최초의 펜폴즈 그랜지를 생산하죠. 이때 만든 펜폴즈 그랜지 1951 빈티지를 아직도 보관하는 개인 수집가들이 있으며, 그중 한 병이 2004년 경매에서 50,000 호주 달러가 넘는 가격에 팔린 일이 있습니다. 2018년 6월 20일 현재 원화로 4,100만 원이 넘는 엄청난 가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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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에 첫 빈티지가 시장에 나왔지만, 당시 호주는 브랜디를 넣어서 만드는 강화 와인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이 넘쳐도 일반 레드 와인(still red wine)으로 만든 펜폴즈 그랜지는 와인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평가와 별 볼 일 없을 거라는 전망 때문에 판매가 부진했죠. 그러자 펜폴즈 경영진은 1957년에 슈버트에게 펜폴즈 그랜지 생산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하지만 슈버트는 회사에는 비밀로 하고 1959년까지 그랜지를 계속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초기 빈티지가 점차 숙성하면서 펜폴즈 그랜지는 진정한 가치를 평가받았고, 1960년에 경영진은 슈버트가 그랜지를 매해 몰래 생산하는 것도 모른 체 다시 그랜지를 생산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레이트 빈티지였던 펜폴즈 그랜지 1955는 1962년에 처음 와인 대회에 출전했고, 이후 몇 년 동안 금메달을 50개 이상 받는 기염을 토합니다. 1971 빈티지는 파리에서 열린 <와인 올림픽>에서 당당히 쉬라즈 부문 1위를 차지했고, 미국의 권위 있는 와인 잡지인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는 1995년에 1990 빈티지를 '올해의 레드 와인(Red Wine of the Year)'으로 선정합니다. 그 후 1998 빈티지가 '아마 100점까지도 줄 수 있는 99점'으로 평가받으면서 펜폴즈 그랜지는 호주 최고의 와인 자리를 굳히죠. 아울러 1991년에 초판이 나온 <랭톤(Langton) 옥션 등급>에서도 펜폴즈 그랜지는 계속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랭톤 옥션의 호주 와인 등급(Langton’s Classification of Australian Wine> 4판에서는 아예 특별 등급(Exceptional Level)으로 인정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펜폴즈 그랜지는 1989 빈티지까지만 해도 <펜폴즈 그랜지 헤르미타즈(Penfolds Grange Hermitage)>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프랑스 론 밸리(Rhone Valley)에 있는 유명한 와인 산지의 이름인 헤르미타즈(Hermitage, 에르미따지)는 호주에서 일반적으로 쉬라즈, 혹은 시라(Syrah)를 뜻하는 단어로 쓰고 있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에르미따지라는 명칭이 붙지 않는 것은 오래전부터 미국이나 호주 와인 중에선 "샤블리(Chablis)"나 "버건디(Burgundy)"처럼 유럽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 이름을 붙여서 마치 유럽에서 만든 고급 와인인 것처럼 소비자를 현혹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와인을 제네릭 와인(Generic Wine)이라고 부릅니다.

유럽연합(EU) 당국은 이런 와인이 소비자들에게 "속았다"라는 불쾌한 경험을 주고, 결과적으로 유럽 와인의 명성에 피해를 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EU를 포함한 와인 생산국에서 레이블에 유럽의 특정 지역 명칭을 적어서 마치 유럽의 고급 와인인 것처럼 소비자에게 혼동을 줄 수 있는 행위를 금지했죠. 펜폴즈 그랜지 헤르미타즈도 프랑스의 지명을 쓸 수 없도록 했습니다. 결국, 1990 빈티지부터 레이블에서" 헤르미타즈(Hermitage)"라는 이름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1989 빈티지 이전의 펜폴즈 그랜지 와인은 와인 수집 아이템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구세계의 값비싼 고급 와인은 대부분 단일 밭이나 포도밭의 작은 구획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듭니다. 그러나 그랜지는 이와 다르게 광범위한 지역의 여러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듭니다. 이것은 매년 와인의 구성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포도가 자라는 특정한 장소에 포도밭에 구애받지 않고 브랜드와 와인 자체의 평가에서 구매자에게 더 가치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죠. 넓은 지역에서 수확한 품질 좋은 포도로 최고의 맛과 향을 가진 와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것은 와인을 "떼루아의 소산"으로 보는 유럽식 관념과 "재료의 품질과 양조 기술의 결과물"로 보는 호주식 관념의 차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비록 펜폴즈가 오리지널 그랜지인 1951 빈티지를 1,800병만 생산했다고 밝혔지만, 펜폴즈 그랜지의 생산량은 매년 크게 다르며 펜폴즈는 정확한 수량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습니다. 포도의 성장 환경에 따른 빈티지의 변화와 사용하는 포도의 품질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부 전문가들은 일관되게 인식할 수 있는 펜폴즈 그랜지 특유의 스타일이 있다고 믿죠.

펜폴즈 그랜지는 레이블에 "펜폴즈 그랜지"라는 이름과 함께 그랜지를 숙성하는 저장고를 뜻하는 "Bin" 번호가 붙습니다. 이 번호는 1951년에는 Bin 1이었고, 1952년에는 Bin 4이었습니다. 이후 빈티지는 다양한 Bin 번호가 붙다가 1964년부터 Bin 95로 통일됩니다.

 

 

이렇게 위대한 와인을 만든 펜폴즈이지만, 소유권은 상당히 여러 회사로 옮겨 다녔습니다. 1980년대에 애들레이드 스팀쉽 그룹(Adelaide Steamship Group)의 자회사인 투쓰 앤 코(Tooth & Co.)는 펜폴즈를 포함한 여러 와이너리를 구매했지만, 1990년에 SA 맥주 지주회사(SA Brewing Holdings)에 그 와이너리들을 다시 팔았습니다. SA 맥주 지주회사는 사들인 와이너리들을 "더 펜폴즈 와인 그룹(The Penfolds Wines Group)"으로 통합했죠. 1994년에 SA 맥주 지주회사는 맥주 종류를 생산하는 SA 맥주회사, 와인을 만드는 사우쓰코프 와인(Southcorp Wines), 다른 활동을 하는 사우쓰코프(Southcorp)의 세 회사로 분리됩니다. 2005년 5월에 박물관에 있는 역대의 펜폴즈 그랜지들과 함께 펜폴즈의 상표 소유권이 사우쓰코프 와인을 사들인 포스터 그룹(Foster's Group)으로 넘어갑니다. 2011년 5월에 펜폴즈는 포스터 와인의 다른 브랜드로부터 분리되어서 호주 증권 거래소에 별도의 회사로 등재되었습니다.

 

참고로 맥스 슈버트와 그의 양조팀은 와인에 "가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1960년대에 Bin 707, Bin 389, Bin 28, Bin 128, Bin 2로 이뤄진 빈 시리즈(Bin Series)를 만들었고, 1976년에는 크눙가 힐(Koonunga Hill)을 만들었습니다. 또 드물지만 슈버트와 그의 계승자들은 독특하고 진귀한 고품질 와인을 선별해서 스페셜 빈(Special Bin) 와인을 만들곤 했죠. 이 와인들은 다른 시리즈와 달리 독특한 울트라 프리미엄 와인(Ultra-Premium Wine)으로 생산되어 빈티지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런 와인으로는 60A, Bin 90A, 칼림나 블록(Kalimna Block) 42가 있으며 전 세계의 와인 수집가들이 이 와인들을 사랑합니다.

 

 

2. 와인의 맛과 향

펜폴즈 그랜지 1996 빈티지는 사우쓰 오스트레일리아(South Australia)의 쉬라즈 99%에 까베르네 소비뇽 1%를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색은 호주의 다른 고급 와인처럼 아주 짙습니다. 테두리 색깔은 16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젊음을 뜻하는 루비 빛이군요. 블랙 체리와 블랙커런트 같은 검은 과일 향과 삼나무를 비롯한 훌륭한 나무 향이 나옵니다. 마치 삼나무 숲에 들어선 듯 그윽한 나무 향이 있고 숲에서 퍼지는 향긋한 베리류의 과일 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진한 프룬(prune) 향과 정향이나 검은 후추 같은 향신료 향, 달콤한 감초 향이 나오며 매캐한 연기 향도 살짝 나타납니다. 향긋하고 세련된 향이 이어지는 가운데 구수한 향도 느껴집니다. 개봉한 지 두 시간이 지나가도 끝을 보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갈하게 세련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향은 쉬이 쇠락하지 않고 강인한 힘을 계속 느낄 수 있죠.

16년이 지났어도 아직 어린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질감이 아주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탄탄합니다. 입안을 적당히 조여주는 기분 좋은 탄닌과 함께 나무랄 데 없이 알맞은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직 더 발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병에서 최소 10년 이상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아직 어려서 안타깝게도 본모습을 100%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맛있습니다! 드라이하며 갈수록 더욱 좋아지는 산미, 약간의 탄닌 외에는 걸리는 것 없이 뛰어난 맛 때문에 저절로 손이 갑니다. 조금씩 줄어드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군요. 기품 있고 고귀하며 세련된 맛으로 호주 와인의 정수를 보여주며, 탄탄하고 우아한 탄닌이 입에서 보여주는 맛은 다른 와인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입니다. 브리딩 없이 곧장 따서 마시는 바람에 와인의 맛을 100% 끌어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디캔터에 담아서 2시간 정도 뒀다 마셨다면 완벽한 맛을 보여줬을 겁니다.

기품 있고 그윽하며 향기로운 여운은 입과 목에서 길게 길게 이어집니다. 멋집니다! 입에서 목까지 쭉 이어지는 진동과 감각은 실로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리다는 사실! 균형은 완벽합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향, 질감, 탄닌, 산도, 여운, 풍미 등등 모든 것이 강하면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균형을 이룹니다. "훌륭하다!"란 말 밖에 안 나오는군요.

다 마신 후 병에 남은 놀랄 만한 양의 추출물
(다 마신 후 병에 남은 놀랄만한 양의 추출물)

현재 1996 빈티지는 국내 와인 샵에서 거의 구할 수 없을 겁니다. 아마 지금쯤 개인 수집가들의 셀러로 모두 들어가지 않을까요? 설령 있다고 해도 처음 시장에 풀릴 때의 몇 배 가격이 붙어있겠죠.

소고기와 양고기 스테이크, 그릴과 오븐에 구운 고기 요리, 소고기 등심과 안심 구이, 숙성 치즈 등과 함께 마시면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줄 겁니다.

개인적인 평가는 A+로 비싸더라도 기회가 되면 꼭 마셔봐야 할 뛰어난 와인입니다. 2011년 3월 31일 시음했습니다.

와인 생산자인 펜폴즈에 관해선 아래의 글을 참조하세요.

 

[호주] 호주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는 - 펜폴즈(Penfolds)

1. 펜폴즈의 역사 펜폴즈는 1844년에 호주에 이민 온 영국의 내과의인 크리스토퍼 로손 펜폴드(Christopher Rawson Penfold)와 부인인 마리 펜폴드(Mary Penfold)가 설립한 와이너리입니다. 호주에서 가장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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