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역사

[역사] 오스트리아의 부동액 와인 사건

까브드맹 2018. 7. 12. 08:00

화이트 와인과 부동액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는 중부 유럽의 와인 강국입니다. 약 4천 년 전부터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었던 고고학적 증거가 발굴되었을 만큼 와인 역사가 오래되었죠. 중세에는 교회가 오스트리아의 와인 산업을 이끌었고, 16세기에는 와인 산업이 번창했습니다. 1780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와 조세프 2세(Joseph II)가 오스트리아의 와인 산업을 진흥하려고 복잡한 주세를 하나로 통일했죠.

19세기에 유럽의 포도밭을 덮쳤던 악몽 같은 신대륙의 침입자인 가루곰팡이(Powdery Mildew=Uncinula necator)와 노균병(Downy Mildew=Peronospora), 필록세라(Phylloxera) 삼총사(?)는 오스트리아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습니다. 와인 생산자들은 침략자들에게 필사적으로 대항했지만, 오스트리아의 와인 산업이 다시 회복되기까지 수십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죠. 이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와인 수요를 채우려고 품질을 고려하지 못한 채 생산량 위주로 싸구려 벌크 와인을 대량 생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오스트리아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와인 생산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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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와인 산업이 무분별하게 성장하면서 자멸의 씨앗이 뿌려집니다. 20세기를 거치면서 오스트리아 와인 업계는 물량 위주로 산업화한 "사업"에 몰두해서 많은 양의 벌크 와인을 독일로 수출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이 되자 광대한 면적의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엄청나게 많은 와인을 생산하게 되었죠. 문제는 이 와인들이 가볍고 묽으며 시큼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아무도 그런 와인을 원하지 않았죠. 상황이 안 좋아지자 오스트리아의 와인 중개업자들은 이런 형편없는 와인에 약간의 화학물질을 첨가해서 시장에서 인기 좋은 고급 와인처럼 느껴지게 하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 화학 물질은 디에틸렌 글리콜(Diethylene Glycol)이며, 부동액(Antifreeze)에서 찾아볼 수 있죠.

부동액을 와인에 넣으면 단맛이 생기고 묵직한 느낌도 들어서 마치 고급 와인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더욱이 와인에 부동액을 넣어도 화학적 검사로 밝혀내기가 무척 어렵다는군요. 그래서 걸리지 않고 잘 넘어갈뻔 했는데... 일당 중 한 명이 세금 문제로 부동액 가격에 클레임을 거는 바람에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천하에 드러난 이 사건을 1986년의 "부동액 와인 사건(The Antifreeze scandal)"이라고 부릅니다. 아주 극소수의 중개업자만 이 사건에 가담했지만, 오스트리아의 와인 수출은 무너졌고, 몇몇 국가는 아예 오스트리아 와인을 전면 수입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죠.

아이러니하게도 오스트리아 와인 산업을 무너뜨린 부동액 와인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와인은 최고급 와인으로 거듭납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서 포도 수확량과 품질을 엄격하게 규제했고, 와인 생산자들은 1990년대의 시장 유행에 따라 레드 와인이나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쪽으로 생산 방향을 바꿨습니다. 중개업자들은 떼루아의 특성을 반영한 와인을 만들고 직거래하려는 생산자들의 압력으로 무너지고 말았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애초에 그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든 조잡한 와인 규정에 반대하고 품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오스트리아 와인 문화가 대대적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부동액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의 고급 와인은 법률에 따라 반드시 병에 로트 번호를 넣어야 합니다.
(부동액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의 고급 와인은 법률에 따라 반드시 병에 로트 번호를 넣어야 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File:Weinflaschenbanderole_%C3%96sterreich.jpg)

오스트리아 정부는 1986년의 사건의 대책으로 "오스트리아 와인 마케팅 보드(The Austrian Wine Marketing Board)"를 창설했고, 오스트리아의 EU 가입은 와인 법률의 개정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그리하여 2002년부터 지역 명칭 제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DAC(Districtus Austriae Controllatus) 시스템을 적용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오늘날 오스트리아 와인의 생산량은 세계 17위이지만, 와인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더구나 소비자들이 비싸더라도 품질 좋은 와인을 선호하기에 생산자들은 와인 생산에 투자하는 비용을 아끼지 않습니다. 와인 가격이 비싸졌지만, 소비자들은 기꺼이 오스트리아 와인을 마시며, 수출시장에서도 그 가격을 인정합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와인은 매우 비싸지만, 거의 오스트리아 국내에서 소비됩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오스트리아 와인의 평판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정부와 생산자의 혁신과 소비자의 지원으로 새롭게 태어난 오스트리아 와인을 보면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만약 비슷한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도 그러한 난관을 극복하려고 더 뛰어난 제품으로 전화위복(轉禍爲福)하려는 정부와 회사를 갖고 있을까요? 소비자들은 값이 비싸더라도 품질 좋은 제품을 기꺼이 구매할 의향이 있을까요?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막걸릿값 100원에 따라 매출이 출렁이는 전통주 시장은 조금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다음번엔 부동액 사건 이후에 다시 제정된 오스트리아 와인 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1. 크리스토퍼 필덴, 와인과 스피리츠 세계의 탐구(Exploring the World of Wines and Spirits), 서울 : WSET 코리아, 2005

2. 영문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 와인 항목

3.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