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생산지

[이탈리아] 시칠리아(Sicilia) 역사편

까브드맹 2018. 3. 30. 15:18

시칠리아 지도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은 지중해 한복판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졌습니다. 일찍이 그리스인이 시라쿠사(Siracusa)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건설했고, 카르타고와 대립하다가 포에니 전쟁 후에 로마의 일부가 되었죠.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과 이탈리아반도의 기독교 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이 되어 수시로 지배층이 바뀌는 혼란스러운 역사를 겪기도 했습니다. 11세기 후에는 유럽 열강들이 이합집산하면서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에 차례로 속하는 등 많은 정치적 격변이 있었고, 지중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펼치려는 영국과 노르웨이도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이는 곳이었죠. 마침내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미국인까지 시칠리아에 상륙합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시칠리아 주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역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외부 민족의 침입이 시칠리아에 상처만 남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칠리아에 발을 들여놨던 수많은 민족은 이 섬에 그들의 문화를 뿌려놓고 갔는데 그중 하나가 다양한 포도 품종과 발달한 영농기술이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에 시칠리아에 들어온 그리스인은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 기술을 전해줬고, 로마가 섬을 점령하면서 이 기술은 더욱 발전합니다. 8~10세기에 시칠리아를 차지한 아라비아인은 당시만 해도 최첨단 영농 기술 중 하나였던 관개시설을 사용한 작물 재배법을 전해줬죠. 19세기엔 영국인이 시칠리아의 마르살라(Marsala) 주민들에게 강화 와인 제조법을 알려주고 와인을 만들게 한 다음 생산한 와인을 구매했습니다. 지금도 시칠리아 서부의 마르살라시와 그 주변에선 도시 이름을 딴 마르살라 와인을 생산하고 있죠.

마르살라(Marsala) 와인과 색상

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머스캣, 모스카델로, 뮈스까, 지비보를 포함하는 모스까토 품종들은 크게 두 계열로 분류되지만, 모두 시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퍼진 것입니다. 첫 번째 계열은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를 지배했을 때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지역으로부터 시칠리아 남쪽 판텔레리아섬에 모스카토 알렉산드리아(Moscato Alexandria)로 나중에 프랑스 알자스와 독일, 마케도니아, 헝가리로 전해져 수많은 스위트 와인의 모체가 됩니다. 두 번째 계열은 서아시아에서 시칠리아 남부인 노토(Noto) 지역에 전해진 모스카토 비앙카(Moscato Bianca)로 모스까토 알렉산드리아와 전혀 다른 포도입니다. 모스까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유럽 각지에서 재배하는 수많은 포도가 시칠리아를 거쳐서 퍼져 나갔습니다.

이렇게 포도 재배법과 와인 양조법을 아는 수많은 민족이 시칠리아를 거쳐 가는 일이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오늘날 세상에서 재배하는 양조용 포도 중에서 시칠리아를 거쳐 가지 않은 것은 없다."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게 되었죠. 또한, 유럽 내륙으로 전파되지 않고 시칠리아에서만 재배하는 특산 포도도 많습니다.

19세기 말에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해서 포도나무를 말라 죽게 만드는 필록세라가 전 유럽을 휩쓸었을 때 시칠리아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섬의 북부에서 남부로 퍼져나가는 속도가 더뎠기에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죠. 이렇게 되자 시칠리아는 필록세라의 창궐로 발생한 와인 수요의 엄청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뿔리아(Puglia)와 함께 싸구려 벌크 와인을 대량 생산합니다. 20세기 초까지 시칠리아는 많은 양의 와인을 수출했는데, 시칠리아 와인이 높은 기온과 적은 강수량 때문에 다른 지역 와인보다 탄닌이 많고 알코올 도수가 높아서 장거리 수송에 유리했던 점이 수출량의 증가에 도움이 되었죠. 오늘날에도 시칠리아의 와인 생산량은 호주 전체의 생산량보다 많고, 당시에는 지금보다 생산량이 3배나 많았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이탈리아 와인법인 DOC 제도가 제정되면서 이탈리아 와인 산업을 뒷받침하기 시작했고, 와인 생산자들의 인식도 변했지만,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기존의 산업 구조를 갑자기 바꾸기는 어려웠습니다. 1980년대 이후 주요 와인 소비국인 유럽과 미국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주로 값싼 벌크 와인인 시칠리아 와인은 점차 안 팔리게 되었죠. 현재 시칠리아에선 12만 헥타르의 포도밭에서 7억 리터의 와인을 생산해 항상 초과 생산을 하는 상황입니다. 와인을 늘 초과 생산 하는 고질적인 이유 중 하나는 팔리지 않는 와인을 정부가 싼값으로나마 사들여서 알코올 생산에 사용하기 때문에 재고를 쌓아둘 걱정이 없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상황이라 시칠리아 와인은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벌크 와인으로 싸게 팔리며, 프랑스의 뱅 드 프랑스(Vin de France) 등급 와인과 호주나 미국의 싸구려 와인을 만들 때 단가를 낮추려고 많이 씁니다. 

시칠리아 와인은 여전히 포도즙이나 발효 과정이 끝난 상태에서 벌크 채로 팔리며, 지역에서 병에 담아 판매하는 고급 와인은 전체의 20%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1990년대가 되면서 와이너리마다 와인 품질의 향상에 큰 노력을 쏟았고, 축적된 노력의 결과로 지난 20여 년간 시칠리아 와인 산업은 종종 "르네상스"라고도 표현될 만큼 많이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섬 전역에서 나타나 시칠리아는 이제 싸구려 벌크 와인의 공급지가 아니라 고유한 레이블을 부착한 고급 와인 생산지로 거듭나고 있으며, 시칠리아 와인은 뛰어난 품질로 각종 국제 대회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또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토종 포도의 생산량이 아주 적었지만, 지금은 많은 와이너리들이 외래 포도 재배에서 토착 포도 재배로 빠르게 돌아오고 있습니다.